[카테고리:] 영혼을 향한 묵상

세상은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혼을 바라보십니다.

이 공간은 영혼의 소중함과 믿음의 여정,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담아 두신 뜻을 조용히 묵상하며 나누는 곳입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영원을 향한 시선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영원한 생명-현 상황이 매우 힘드신가요? 그보다 더 평생 힘든 일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현 상황이 매우 힘드신가요? 그보다 더 평생 힘든 일이 있습니다

    요즘 마음이 많이 힘드신가요?
    무엇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아무리 견뎌 보려고 해도 상황이 쉽게 달라지지 않고, 하나의 어려움이 지나가기도 전에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오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저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고 아직 현재 진행형의 시간입니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힘겨운 시간을 지나왔고, 그 가운데 어렵게 시작했던 소송 사건마저 1심에서 패소라는 결과를 받아들게 되었습니다.

    판결문을 받아들고 나니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그동안 사건을 돌아보고 자료를 정리하고, 내가 겪었던 일을 하나씩 기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결과가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나오니 마음이 허무하기도 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힘든 일이 계속되는 것일까?’

    ‘나는 언제까지 이 시간을 지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들이 마음을 오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제 마음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현 상황이 많이 힘든가?”


    네, 지금 많이 힘듭니다

    솔직히 말하면 힘듭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이 무겁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순간순간 낙심이 찾아옵니다.

    특히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일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마음이 쉽게 무너집니다.

    사람은 결과를 통해 자신의 삶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잘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같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혹시 내가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흔들립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마음에 다시 질문이 들려왔습니다.

    “현 상황이 그렇게 힘든가?”

    그리고 그 질문 뒤에 이런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그보다 더 힘겹고, 평생 힘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그 순간 제 시선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시선이었습니다.


    지금의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문제를 가장 크게 생각합니다.

    돈이 부족하면 돈 문제가 가장 큰 문제처럼 느껴지고, 소송에서 패소하면 그 패소가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우면 그 관계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넓혀 보면 알게 됩니다.

    지금 내가 겪는 모든 일은 이 땅에서의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긴 고난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도 결국에는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오늘의 눈물도 언젠가는 멈추고, 오늘의 실패도 언젠가는 지나간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 영원한 생명 내 영혼의 문제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겪는 고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서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제 마음에 ‘지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지옥에 대한 생각은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지옥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지옥에 대한 말씀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위한 말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먼저 내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게 하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에는 참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지,

    어떻게 하면 지금의 어려움에서 벗어날지를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영원한 생명, 영혼의 문제에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래서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 상황이 매우 힘든가?
    그보다 더 평생 힘든 일은 영원한 생명의 문제일 수 있다.”

    이것은 지금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힘든 것은 힘든 것입니다.

    억울한 것은 억울한 것이고, 실패는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영원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저는 그 답을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주님을 묵상하는 삶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부지런히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묵상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부터 내 생각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로 영원한 생명에서 점차로 멀어지게 합니다.

    내 감정이 기준이 되고,

    내 억울함이 기준이 되고,

    내 욕심이 기준이 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준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원하는 답을 하나님께 요구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실지,

    주님이라면 지금 내가 어떤 말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주님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주님을 묵상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닐까요?

    때로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억울할 때 용서해야 할 수도 있고,

    내가 화가 날 때 말을 멈춰야 할 수도 있고,

    내가 옳다고 생각할 때에도 한 걸음 물러서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조금씩 배워 갑니다.

    그래서 주님을 묵상하는 일은 단순히 조용히 앉아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순간 순간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묻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 요한복음 17장 3절에 따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말씀처럼 주님을 알아야 하고 주님 뜻을 구하는 삶이 같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을 때에는 서두르지 않고 다시 주님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무엇을 결정할 때 마음이 쫓기고 불안한 가운데서 하면 안 됩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3490


    힘든 순간일수록 더 깊은 분별이 필요합니다

    특히 마음이 힘들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이 쫓기고 불안할 때 평소와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억울한 마음이 커지면 말이 거칠어질 수 있고,

    두려움이 커지면 조급한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분노가 커지면 나중에 후회할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주님의 뜻과 맞는가?”

    “내가 하려는 행동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것인가?”

    “이 선택을 주님 앞에서도 떳떳하게 할 수 있는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 멈추어 서면 마음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소송도 제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의 소송 결과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마음이 아픕니다.

    패소라는 결과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항소를 준비하는 과정도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 사건이 제 인생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승소한다고 해서 제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패소한다고 해서 제가 가치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법원의 판결이 제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결과가 제 영혼보다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하나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주님, 이 사건의 결과를 어떻게 만들어 주실 것인가”만 묻기보다,

    “주님, 이 시간을 통해 제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라고 묻고 싶습니다.


    주님을 묵상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주님을 계속 묵상한다고 해서 상황이 즉시 달라지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문제가 당장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를 바라보는 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억울함만 보였다면 이제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되고,

    예전에는 결과만 중요했다면 이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묵상하는 일은 우리의 삶을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묵상하고,

    내 마음속에 있는 욕심과 분노와 교만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주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에 지옥을 생각하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글이 단순히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글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묵상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주님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마음을 알고 싶기 때문에 기도하고,

    내 뜻대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분별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주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를 구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다면 영원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지금 삶이 너무 힘드신가요?

    저도 지금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오늘의 실패도 지나갑니다.

    오늘의 눈물도 지나갑니다.

    오늘의 억울함도 언젠가는 끝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고통 때문에 영원한 생명, 영원한 것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게도 다시 말합니다.

    “지금의 상황이 많이 힘들지?
    그래도 이것이 전부는 아니야.”

    지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 영혼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얼마나 가까운지 돌아봅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주님의 뜻에 맞는지 분별합니다.

    그리고 잘 모르겠을 때는 서둘러 결정하지 않고 다시 주님 앞에 머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수많은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승리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도 있고 오해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을 지나면서 제가 붙들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을 묵상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과 감정이 앞서지 않도록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소송의 결과가 아무리 마음 아파도,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어도,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을 놓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은 지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제 자신에게 다시 말합니다.

    “지금의 고난 때문에 영원을 잊지 말자.
    세상의 문제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놓치지 말자.
    주님을 부지런히 묵상하자.
    그리고 매 순간 주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지금 힘겨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제가 제 자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주님,
    오늘의 상황보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하시고,
    내 생각보다 주님의 마음을 먼저 구하게 하시며,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소서.
    힘든 순간에도 주님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게 하시며,
    끝까지 주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오늘날 교회는 많아졌는데, 왜 우리의 정서는 메말라가고 있을까요?

    오늘날 교회는 많아졌는데, 왜 우리의 정서는 메말라가고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예전보다 교회의 수는 훨씬 많아졌고, 다양한 예배와 프로그램, 사역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게 됩니다.

    교회는 많아졌는데 왜 우리 사회와 교회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을까요?

    우울과 불안, 외로움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은 쉽게 지치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하나님보다 활동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본래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쉼과 회복을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예배의 횟수와 봉사의 양, 프로그램의 다양성, 교회의 성장과 같은 눈에 보이는 활동들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물론 이러한 활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보다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사람의 영혼은 쉽게 지치게 됩니다.

    사람의 정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건강하게 회복됩니다.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마음은 메말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 42:1)


    2. 말씀은 많이 배우지만 삶으로 경험하는 신앙은 부족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설교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 공부 자료도 풍성하며 다양한 신앙 콘텐츠도 넘쳐납니다.

    하지만 말씀을 많이 아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신앙은 마음까지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은혜를 체험하며, 삶 속에서 말씀이 살아 움직일 때 우리의 정서도 함께 회복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건강한 정서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마음의 방향과 하나님의 시선



    3. 세상의 경쟁 문화가 교회 안에도 들어왔습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더 성공해야 하고,

    더 인정받아야 하며,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문화가 교회 안에도 스며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규모를 비교하고,

    사역의 성과를 비교하며,

    신앙의 모습을 서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사랑보다 경쟁이 앞서게 됩니다.

    비교가 많은 곳에서는 정서가 건강하게 자라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쟁보다 사랑을, 비교보다 섬김을 원하십니다.


    4. 상처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부족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아픔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판단받지는 않을까?’

    ‘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웃는 얼굴 뒤에 깊은 상처를 감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교회는 원래 상처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함께 회복되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서로의 약함을 정죄하지 않고 품어 주는 곳입니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38752

    5. 성령의 열매보다 성과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은 신앙의 성숙을 외적인 성공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열매를 통해 사람의 변화를 말씀합니다.

    • 사랑
    • 기쁨
    • 화평
    • 오래 참음
    • 자비
    • 양선
    • 충성
    • 온유
    • 절제

    이러한 열매들은 건강한 정서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성과보다 사람의 내면을 세워 가는 일에 더욱 집중할 때 성도들의 정서도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오늘날 상담사역이나 치유사역, 다양한 회복 프로그램들이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프로그램으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서는 영혼이 살아나고,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곳에서는 마음이 회복되며,

    성령께서 일하시는 곳에서는 상한 정서도 새롭게 됩니다.

    프로그램은 도울 수 있지만,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영적인 풍요는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가 크고 프로그램이 다양하면 신앙도 자연스럽게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 공동체와 건강한 예배는 매우 소중한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정서가 메말라가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시간보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더 많고,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보다 걱정과 염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지쳐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가까이 부르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기도를 통해 마음을 회복시키시며, 성령님의 위로로 메마른 심령을 다시 적셔 주십니다. 영적인 회복은 특별한 사람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은혜입니다.

    회복은 하나님께 다시 시선을 돌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의 모습보다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감사와 감격,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리던 마음, 기도 속에서 누리던 평안이 다시 살아날 때 우리의 정서도 함께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환경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쉼을 얻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조용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 메마른 마음은 다시 생명을 얻고, 잃어버렸던 감사와 기쁨이 조금씩 회복될 것입니다.

    맺음말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서적으로 많이 지쳐 있습니다.

    교회 역시 이러한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교회를 통해 사람들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품어 주는 공동체가 될 때,

    메마른 정서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결국 정서의 회복은 인간적인 방법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정서도 함께 치유되고 회복될 것입니다.📚🍀✨💒

  •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죽음-삶의 마지막에서 발견하는 가장 중요한 진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이 말을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정말 그럴까요?

    어릴 적,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소는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물도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동물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도망가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공포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생명을 보존하려는 본능일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인간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이 인식되어지면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오늘날 교회는 많아졌는데, 왜 우리의 정서는 메말라가고 있을까요?

    • 출처: ChatGPT(DALL·E)를 활한 AI 이미지용해 제작


    그러나 인간은 한 가지가 다릅니다.

    건강할 때도,

    젊을 때도,

    생각하며 질문합니다.

    “나는 왜 사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내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영원을 향한 질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됩니다.

    영혼은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

    이 말씀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본능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인간은 단순히 생명의 끝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돌아보고,

    관계를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은 영혼을 가진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57717

    죽음은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누구를 사랑했는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없는가?”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늘을 더 소중히 살아갑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미루어 두었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의 성공만을 좇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삶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유한한 시간이기에 더욱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 귀한 선물입니다.

    영원을 바라볼 때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집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움보다 먼저 삶의 우선순위를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내가 가장 소중하게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고, 진실을 선택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에서 쌓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남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를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과 화목하며,

    오늘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죽음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하는 능력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삶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은 오늘을 더욱 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

    에필로그

    우리는 죽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질문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언젠가 이 땅의 삶을 마치게 될 우리는 오늘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죽음은 삶을 허무하게 만드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거울입니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오늘의 선택은 더욱 중요해지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도, 용서할 수 있는 기회도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소망이 이 땅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할 소망으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오늘 하루가 마지막 하루라면 우리는 누구를 먼저 찾아갈까요? 누구에게 사랑을 전하고, 누구를 용서하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선택할까요? 이러한 질문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귀한 물음입니다.

    결국 죽음은 우리에게 언제 떠날 것인가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루하루를 후회보다 감사로 채워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마지막 순간에도 두려움보다 소망을 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 용서-죽음을 앞두고 가장 어려운 일은 왜 일까?

    용서-죽음을 앞두고 가장 어려운 일은 왜 일까?

    마지막 순간 우리에게 남는 관계의 질문

    사람들은 왜 죽음 앞에서 용서의 문제가 가장 큰 어려운 일이 될까요?

    많은 사람들은 가장 먼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떠올립니다. 함께 웃고 울었던 가족,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 자녀와 친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큰 슬픔입니다.

    분명 그것도 죽음을 두렵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면 죽음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이별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서로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비교적 평안한 얼굴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육체의 고통은 있을 수 있지만 마음만큼은 의외로 담담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마음속 깊이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원망, 미움, 후회와 죄책감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더욱 큰 불안과 두려움 속에 머무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결국 죽음을 가장 무겁게 만드는 것은 관계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묻게 합니다

    사람은 평생 성공과 명예를 위해 살아갑니다.

    더 좋은 직장,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자리, 더 큰 성취를 이루기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놀랍도록 달라집니다.

    “내가 얼마나 벌었는가.”

    “얼마나 유명했는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는가.”

    이런 질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 마음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과 화해하지 못했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는데…”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본질을 다시 보여 줍니다.

    평생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마지막 순간에는 생각보다 작은 것이 되고, 평소에는 뒤로 미루었던 관계가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옵니다.


    *하나님 그분이 인식되어지면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엄마도 몰라서 하나님께 묻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출처 : AI 창작 이미지 | ChatGPT(DALL·E) 활용 제작

    용서는 상대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 상처에 더 이상 내 인생이 묶여 있지 않도록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선택입니다.

    미움을 오래 품고 살아갈수록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사람은 의외로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분노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원망은 기쁨을 빼앗으며, 복수심은 평안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를 위한 선물이기 전에 내 영혼을 위한 자유입니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57717

    죽음을 앞두면 후회하는 것은 대부분 관계입니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보다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더 아쉬워합니다.

    한마디 따뜻한 말을 하지 못한 것.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한 것.

    사과해야 할 때 자존심 때문에 미루었던 것.

    이러한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음은 그런 기억들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성경은 화해를 미루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권면합니다.

    물론 모든 관계가 우리의 노력만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가 마음을 닫고 있을 수도 있고, 이미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대의 반응보다 내 마음의 방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하기로 결단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조금씩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풀리면 용서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용서하기로 결단할 때 마음도 조금씩 따라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내 상처를 맡기고 용서를 선택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기 시작합니다.

    용서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상처를 여러 번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치유의 여정이며,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가십니다.


    지금이 용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죽음은 언젠가 반드시 우리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실만큼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은 특별한 일을 하는 삶이 아닙니다.

    오늘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감사하며,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용서해야 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용서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두려움보다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지막 순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재산도, 명예도, 성공도 아닙니다.

    사랑했던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회복된 관계, 그리고 용서함으로 자유로워진 마음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용서하라. 오늘 사랑하라. 오늘 화해하라.”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사랑과 용서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이유를 몰라도 흘러나오는 감사, 그것이 진짜 감사입니다.

    이유를 몰라도 흘러나오는 감사, 그것이 진짜 감사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사할 이유가 있을 때 감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감사하고, 기도한 것이 응답되었을 때 감사하고,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물론 이런 감사도 귀한 감사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 다른 감사가 있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유를 다 알지 못하는데도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오는 감사입니다.

    무언가 특별히 좋은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감사가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감사할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참된 감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사할 이유가 있을 때의 감사

    우리는 대부분 눈에 보이는 이유를 가지고 감사하는 데 익숙합니다.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도했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사하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감사하고,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감사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감사하기도 합니다.

    이런 감사는 자연스럽습니다.

    좋은 일이 생겼는데 감사하지 않는 것보다 감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조금 더 깊어지면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감사할 수 있는가?”

    기도했지만 아직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감사의 깊이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좋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

    참된 감사는 상황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좋으면 감사하고 상황이 나쁘면 감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감사는 결국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감사는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지금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앞날을 볼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앞날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왜 이런 일을 지나고 있는지 알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은 제가 왜 이런 상황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믿음에서 나오는 감사가 아닐까요?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58559



    이유를 몰라도 감사가 흘러나올 때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분명 힘든 상황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마음속에서 감사가 올라올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특별히 감사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 앞에 앉아 있으면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저는 그런 감사가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감사의 근거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변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보다 더 귀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감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할 때 그 안에는 사실 이런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저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제 앞길을 보고 계십니다.”

    “저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보다 더 크신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감사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드릴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감사가 기도보다 먼저 나오기도 합니다.

    “주님, 이것을 해결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

    “주님, 그래도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조금 달라집니다.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감사한다고 해서 아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감사한다고 해서 힘든 일이 힘들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이 나는 상황에서 억지로 웃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픈데 아프지 않은 척할 필요도 없습니다.

    힘든데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도 아십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울면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다 내려놓고 나면, 이상하게 마지막에는 감사의 고백이 남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계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그 감사가 귀한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앞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일을 내가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내일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사가 신뢰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보다 앞서 가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응답의 결과보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몰라도 흘러나오는 감사

    어쩌면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감사의 이유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이 함께 계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면,

    나중에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특별한 이유를 찾지 않아도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그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감사하고,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시기에 감사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길을 알고 계시기에 감사하고,

    내 삶을 붙들고 계시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참된 감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는 환경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감사할 이유를 찾아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게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가운데서도 감사할 이유를 찾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응답되지 않은 기도 때문에 낙심하고 있다면,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기에 감사합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아 두렵다면,

    “내가 보지 못하는 길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에 감사합니다.”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는 상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을 없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면서도 그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답을 얻지 못했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유를 알지 못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내가 지금 상황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구나.”


    이유를 몰라도 흘러나오는 감사

    저는 그런 감사가 제 삶에 더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힘든 날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응답을 받았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직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

    모든 이유를 이해한 후에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쩌면 진짜 감사는

    “주님, 이것이 좋아서 감사합니다.”

    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 이것이 왜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기에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무런 이유를 찾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어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어도,

    아직 기다려야 하는 응답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으며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유를 몰라도 흘러나오는 감사,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짜 감사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상황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유를 다 알지 못해도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회개하는 죄인과 끝까지 악을 붙드는  사람의 차이

    회개하는 죄인과 끝까지 악을 붙드는 사람의 차이

    회개하는 죄인 & 끝까지 악을 붙드는 사람

    우리는 종종 사람을 판단할 때 그가 저지른 행동만을 보고 결론을 내립니다.

    큰 죄를 지으면 악인이라 부르고,
    실수가 적으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쉽게 그 사람을 정죄하고, 반대로 겉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조금 다른 시선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느냐만을 가지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죄를 깨달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진리가 자신의 잘못을 비추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돌아가느냐?”

    바로 이 질문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모두 같은 모습은 아닙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실수하고, 넘어지고, 때로는 알고도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은 사람과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성경의 기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심각한 죄와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죄를 지었느냐의 여부만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울을 위대한 사도라고 부릅니다.

    복음을 전했고, 수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도 어두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고, 성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기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당시의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좋은 의도로 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끝까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돌이켰습니다.

    바울의 과거가 없었던 일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저질렀던 일이 지워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붙들고 살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죄를 지었던 사람이었지만 회개를 통해 새로운 방향으로 걸어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고백했던 제자였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상황이 달라지자 베드로는 두려워졌습니다.

    결국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느꼈을 절망은 얼마나 컸을까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완전히 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야기는 실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가볍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실패를 붙들고 살아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고, 다시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다윗 역시 무거운 죄를 범했습니다

    다윗을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사랑받은 왕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에도 결코 가볍지 않은 죄가 있었습니다.

    그는 밧세바와 간음했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드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라고 말할 수 없는 큰 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의 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나단을 몰아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깊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랑하며 끝까지 붙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죄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죄인과 악인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타날까요?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악인은 단순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일까요?

    성경은 악인의 특징을 단순히 죄의 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진리가 자신을 비추는 것을 싫어하는 태도에서 악인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고 돌이킬 수도 있습니다.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끝까지 죄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보여 주셔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화를 냅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한다.”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했다.”

    이렇게 계속해서 자신의 죄를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붙듭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에는 자기합리화가 자리 잡습니다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하면 마음이 점점 굳어집니다.

    처음에는 작은 변명으로 시작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상대방 때문이었어요.”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셔도 마음을 닫게 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고백이 시작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분별력이 있는 자들은 본질을 추구합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1134


    악인은 빛보다 어둠을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빛이 비추면 감추어 두었던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면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욕심이 보일 수 있습니다.

    미움이 보일 수 있습니다.

    교만이 보일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것인가?

    아니면 빛을 거부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회개하는 사람은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프고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반면 끝까지 악을 붙드는 사람은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는 사람을 미워하고, 말씀의 책망을 거부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라는 말은 단순히 입으로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방향의 변화가 있습니다.

    내가 가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회개했다고 해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전과 똑같은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과,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넘어졌을 때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잘못했을 때 용서를 구하는 것.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조금씩이라도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가는 것.

    이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과거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과거를 쉽게 기억합니다.

    “저 사람은 예전에 저런 일을 했어.”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한 번의 잘못을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에는 과거의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핍박자에서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이었지만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도로 쓰임 받았습니다.

    다윗 역시 큰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사람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을 새롭게 빚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완전히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요?

    우리 자신도 이 말씀 앞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면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야.”

    라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혹시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외면하고 있는 영역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설교를 들으면서 “저 말씀은 저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의 잘못은 크게 보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지 않은지,

    하나님께서 고치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자존심 때문에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회개는 다른 사람을 향한 말이 아니라 가장 먼저 나 자신을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때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말씀을 통해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설교를 통해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마음을 찌르는 말씀으로 깨닫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통해 우리의 잘못을 보여 주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겪는 상황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들은 후 우리의 반응입니다.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씀을 밀어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어.”

    “내가 왜 사과해야 해?”

    “내가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어.”

    라고 자신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 생각을 너무 앞세웠습니다.”

    “제가 교만했습니다.”

    “제가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제가 하나님보다 제 자존심을 붙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진짜 문제는 죄의 크기보다 마음의 방향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후 끝까지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한 사람은 빛 앞에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빛을 피해 자신의 모습을 감춥니다.

    한 사람은 죄를 인정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죄를 정당화합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의를 붙듭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다른 한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길을 고집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너는 죄를 지었느냐?”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이 있습니다.

    “너는 죄를 깨달았을 때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회개조차 우리의 힘으로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우쳐 주시고,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시며, 다시 하나님을 찾도록 이끄시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지어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작은 잘못 하나에도 마음이 아프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 차이는 단순히 성격의 차이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것을 부끄러워하기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제가 이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 마음을 바꾸어 주십시오.”

    “다시 같은 길로 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는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은혜의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에게 조용히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내 잘못을 인정하는가?

    아니면 먼저 변명하는가?

    내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사과할 수 있는가?

    아니면 상대방의 잘못을 먼저 이야기하는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내 마음을 비추실 때 그 빛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불편하다는 이유로 말씀을 밀어내는가?

    나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죄를 붙들면서도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가?

    이 질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한 질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귀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애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벽함만이 아닙니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마음,

    잘못했을 때 인정하는 마음,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돌아오는 마음,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어디로 돌아가느냐입니다.

    자신의 의를 붙들고 일어나려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다시 일어날 것인가?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때문에 은혜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마무리하며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도 우리가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이 있지는 않습니까?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미움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붙들고 있는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끝까지 변명하고 정당화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까요?

    베드로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바울처럼 자신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삶의 방향을 돌이켜야 할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렇게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죄를 보게 해 주십시오.”

    “제가 변명하지 않게 하시고, 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게 해 주십시오.”

    “죄를 붙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넘어졌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오늘도 죄를 붙들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깨닫는 순간 하나님께 돌아가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질 때 그 빛을 피하지 않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제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여 주십시오.”

    이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다시 주님을 향해 걸어가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