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십자가

  •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막연하게 대답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훌륭한 성인이나 사랑을 가르치신 위대한 스승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구원자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아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믿느냐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식과 구원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마태복음 3:17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러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잘 섬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태복음 16:16

    여기서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곧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우연히 등장한 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매우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요한복음 1:1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14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요한복음 14:9

    예수님의 삶과 말씀과 행동을 바라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로마서 3:23

    죄는 단순히 우리가 저지른 몇 가지 잘못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누가복음 19:10

    예수님은 길을 잃은 사람을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이사야 53:5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한 희생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요한복음 1:29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포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 마태복음 28:6

    부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요한복음 11:25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은 글

    「사도 바울이 전도자들에게 줬던 4가지 단순한 지침」 — 최덕성 칼럼, 크리스천투데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분명히 아는 것은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중심에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복음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글은 바울이 전도자들에게 무엇을 전하도록 가르쳤는지를 살펴보면서, 결국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사람의 지혜나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에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조금 더 깊이 묵상하고 싶은 분이라면 함께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8191


    *천국은 어떤 곳인가? 누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가|성경이 말하는 천국과 구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선행이나 노력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4:6

    예수님은 여러 가지 구원의 방법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사도행전 4:12

    구원의 중심에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중보자이십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디모데전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디모데전서 2:5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시는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현재의 삶이 조금 더 평안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면 이제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내 감정과 판단을 따라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17

    예수님은 우리의 겉모습만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회개와 순종과 변화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와 부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요한복음 14:3

    예수님은 다시 오실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단지 과거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계시며 우리와 함께하시고, 장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단순히 알고 있는 데서 그치지 말고 믿고 영접하라고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요한복음 1:12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고 싶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요한복음 14:15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쉽게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만 예수님을 생각할 수도 있고, 힘들 때 도움을 주시는 분 정도로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크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구주이십니다.

    또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살아 계시고, 장차 다시 오실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이유도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해서이고, 기도하는 이유도 주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이유도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와 가치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으로 무엇이 옳은지 말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든 소리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히브리서 12:2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길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때 믿음은 결국 선택의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도 조금씩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종교생활을 위한 분이 아닙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며, 죄에서 건지시는 구원자이시고,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길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한복음 10:11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에 가기 위한 수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예수님을 정말 누구라고 믿고 있는가?”

    예수님을 단지 성경 속의 인물로 알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태복음 16:16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 순종이 가장 어려웠던 자리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

    순종이 가장 어려웠던 자리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순종을 배웠습니다.

    말씀을 읽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것도 순종이었고, 내 생각과 다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도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게 가장 어려웠던 순종 중 하나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 말이 조금 낯설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이 문제가 단순히 부부 사이의 갈등이나 성격 차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문제였고, 하나님 앞에서 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아프고 긴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결혼하면 모든 것이 다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 제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기대가 있었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함께 말씀을 배우고, 함께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서로를 세워 주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정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기대했던 모습과 현실 사이에는 점점 큰 간격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결혼생활과는 다른 모습이 나타났고, 제가 기대했던 신앙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제 마음속에 있던 기대가 하나씩 무너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신앙을 바라보는 방향까지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무엇보다 신앙의 본질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저의 신앙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오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저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사역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저는 말씀의 기준을 배우려고 했고, 남편은 사역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는 마치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현실에서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참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도무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주님은 제 마음에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라.”

    “내가 너에게 말한 것을 믿어라.”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변할 가능성도 없어 보였고, 제가 무엇인가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목놓아 울기도 했습니다.

    어떤 날은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말할 힘조차 없어서 그냥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기도를 해야 하는데 기도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님! 남편에게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마음속에는 수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입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게 십자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님께서 제 마음에 십자가를 비추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참 이상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 싶었는데,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제가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제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던 것들,

    그 모든 말들이 십자가 앞에서는 잠잠해졌습니다.

    십자가는 제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길이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내어주신 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제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것은 단순히 남편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자아와 내 뜻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본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서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돕는 자다”

    어느 날 주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돕는 자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제 마음은 참 복잡했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돕는 자’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돕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무조건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일까?

    내 생각은 내려놓고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디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일까?

    많은 질문이 생겼습니다.

    남편에게는 도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이 말씀을 가르쳐 가셨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돕는 자’는 내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생각도 없애고,

    내 감정도 무시하고,

    내가 받은 상처도 없는 것처럼 만들고,

    무조건 상대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제게 먼저 내가 누구의 사람인가를 다시 묻게 하셨습니다.

    나는 남편의 사람이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남편을 돕는 것도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 안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사람을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기까지 제 안에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순종은 상대가 완벽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사람을 바라보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상대가 완벽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대의 모든 행동이 옳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상대를 인정하기 때문에만 순종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주님, 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붙들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순종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은 남편보다 먼저 제 마음을 다루셨습니다

    그 시간을 지나면서 저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고,

    남편의 신앙이 달라져야 하고,

    남편의 행동이 달라져야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남편을 먼저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을 먼저 만지셨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기대를 내려놓게 하셨고,

    사람을 바라보며 실망했던 마음을 내려놓게 하셨고,

    제가 옳다는 생각에 붙들려 있던 마음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제게 하나씩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서야 할 자리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6641


    순종은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배운 또 하나의 순종은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말해서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

    내 힘으로 상황을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는 것.

    때로는 이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다림 속에서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는 것이었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씀드리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씀드리고,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제가 배워간 순종이었습니다.


    순종은 아픔이 사라진 뒤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는 순종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순종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순종하면 상황도 곧 좋아지고,

    순종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가 경험한 순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픈 가운데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었고,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말씀을 놓지 않는 것이었고,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마음에 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누군가가 제게 순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쉽게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순종은 책에서 배운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순종은 십자가 앞에서 내가 내려놓아야 했던 수많은 것들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돕는 자’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예전에는 ‘돕는 자’라는 말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도와야 하는데, 돕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돕는다는 것은 상대의 모든 것을 대신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잘못한 것까지 옳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니며,

    내 존재를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말해야 할 것도 있고,

    때로는 기다려야 할 것도 있고,

    때로는 내려놓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을 내 감정이나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찾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에도 주님은 함께 계셨습니다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몰랐습니다.

    왜 이런 시간을 지나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주님께서 왜 제게 그렇게 어려운 순종을 요구하시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울었습니다.

    말할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알 것 같습니다.

    그 시간에 주님은 저를 버려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울고 있을 때도 함께 계셨고,

    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도 함께 계셨고,

    제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도 그곳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보아라.”

    저는 그 시간을 통해 남편에게 순종하는 법만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고,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배웠고,

    내 뜻을 내려놓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조금씩 배웠습니다.


    순종은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크게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순종을 완전히 다 배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제 안에는 내 생각이 있고,

    내 감정이 있고,

    내가 원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때로는 다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압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붙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기 위해 울었던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때의 눈물은 하나님께서 모르고 계셨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아픔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은 주님께서 제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을 만지시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며,

    제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가르쳐 주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순종을 말할 때 쉽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순종은 때로 눈물로 배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서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도 제가 먼저 순종하게 하소서

    주님,

    제가 다른 사람의 변화를 기다리기 전에

    먼저 제 마음을 돌아보게 하소서.

    제가 옳다는 생각에 붙들리기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이게 하소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아픔 가운데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

    제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사랑으로 섬기는 것임을 배우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에게 순종하기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제가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앉습니다.

    제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지만,

    한 가지는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에는

    반드시 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그때도 주님이 함께 계셨음을

    고백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사형을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사형을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형을 쉽게 말하는 사람

    십자가를 안다 하고 사형을 너무도 쉽게 말하는 최근 사회를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정치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비난합니다.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가장 강한 형벌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까지도 누군가를 향해 너무 쉽게 사형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죄는 죄입니다. 법을 어겼다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사회의 정의도 반드시 세워져야 합니다. 신앙은 불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세상과 다른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오늘 우리가 용서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사람의 생명을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많아졌는데, 왜 우리의 정서는 메말라가고 있을까요?

    *인식이 바뀌면 삶의 의미가 보인다 – 의미는 발견하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출처 : AI 창작 이미지 | ChatGPT(DALL·E) 활용 제작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 앞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죄를 용납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돌아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죄였는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았음을 알기에 다른 사람을 향한 말도 신중해집니다.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향한 긍휼까지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법은 법대로 판단해야 하고, 재판은 증거와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판관이 아닙니다. 감정과 분노로 누군가의 생명을 쉽게 단정하는 것은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의 태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긍휼을 말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긍휼이 함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무게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동시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고, 생명 또한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의 말 속에는 분노가 은혜를 이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정의를 구하면서도 긍휼을 잃지 않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왜 생명을 소중히 여길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닙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사건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드러난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쉽게 비난하고 정죄했던 사람도, 이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한 영혼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누군가의 실패를 보며 “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먼저 말하기보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도하게 됩니다.

    물론 죄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져야 합니다. 정의는 반드시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언제나 회개의 문을 닫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향해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하셨고, 여인에게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76593

    우리가 쉽게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 누군가를 너무 쉽게 판단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지 못하면서도 댓글 하나로 사람을 정죄하고,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처럼 낙인찍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는 먼저 자신의 죄를 보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

    이 질문 앞에서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심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정의를 말하면서도 긍휼을 잃지 않습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혹시 오늘 누군가를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의 과거를 붙잡고 계속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먼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기억은 다른 사람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회개의 가능성을 믿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닮아 가는 삶. 그것이 십자가를 아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에필로그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상징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진심으로 경험한 사람은 생명을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닮아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 앞에 머문다면, 심판보다 긍휼을, 분노보다 사랑을, 정죄보다 회복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가장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 옳은 일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지만, 그 끝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옳은 일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지만, 그 끝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최근 국제사회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갈등이 이어지고,
    국가들은 서로를 비난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악을 막기 위해서는 강한 조치가 필요하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수많은 사람들과 생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한쪽의 말만 쉽게 맞다고 하기도 어렵고,
    반대로 틀렸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현실은 복잡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바라보며 한 가지 분명하게 떠오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반드시 옳은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옳은 일을 망설이는가?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이 옳은 일 인지 전혀 몰라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옳은 일을 선택했을 때 따라올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하면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정의를 세우려 하면 반발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관계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진리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그 진리를 외면할 이유를 찾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나 하나 행동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

    그렇게 합리화가 시작됩니다.

    합리화는 우리의 마음을 잠시 편안하게 만들지만,
    진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그분이 인식되어지면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출처 : AI 창작 이미지 | ChatGPT(DALL·E) 활용 제작


    대가가 두렵다고 옳은 일을 포기할 수 있는가?

    성경 속 하나님의 사람들은 늘 이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노아는 조롱을 감수해야 했고,

    모세는 바로와 맞서야 했으며,

    다니엘은 사자굴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조차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은 가장 옳은 길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큰 대가를 요구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단순히 옳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일을 위해 어떤 대가를 감당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공의를 말하면서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균형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공의를 이야기하면서
    그 과정에서 상처 입는 사람들의 아픔을 너무 쉽게 지나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피해와 고통만 바라보다가
    결국 불의에 대한 판단 자체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죄라고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죄인 한 사람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다.

    죄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동시에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그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타협이 반복될 때 하나님의 공의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많은 사람들은 묻습니다.

    “타협하며 살아도 당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다만 그것이 언제나 즉각적인 심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무서운 일은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지만,

    합리화가 반복되면 양심이 무뎌지고,

    양심이 무뎌지면 결국 자신이 옳다고 믿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스스로를 속이는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심은 것은 결국 거두게 됩니다.

    진리를 외면한 선택 역시 언젠가 그 열매를 맺게 됩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04622


    하나님의 뜻은 결과보다 과정 속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눈에 보이는 성공이나 좋은 결과로만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까지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노예가 되었고 감옥에 갇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니엘은 신앙을 지키다가 사자 굴에 던져졌으며,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직을 선택하면 손해를 볼 수 있고, 진실을 말하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선택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당장은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순종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시며 가장 좋은 때에 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옳은 길을 걷는 동안 결과가 더디게 보인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충성, 인내,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까지도 사용하여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하시고, 결국 자신의 선한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도 눈앞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선택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걸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길을 걷는 사람과 함께하시며, 그 여정을 통해 우리와 주변 사람들까지도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보다 정직한 사람을 찾으신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 완벽한 사람만 찾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대가가 부담스러워 진리를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지만 다시 일어섰고,

    다윗은 큰 죄를 범했지만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하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무리

    세상에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습니다.

    전쟁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우리의 일상 속 선택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옳은 일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릅니다.

    그 대가가 두렵다고 진리를 포기하면 결국 타협이 시작됩니다.

    반대로 공의를 말하면서 사람의 아픔과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대가가 두렵더라도,
    합리화로 진리를 포기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옳은 일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모든 것을 공의롭게 판단하시며 동시에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

  • 십자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예배를 경험합니다.

    아름다운 찬양이 있고, 감동적인 설교가 있으며, 따뜻한 교제와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져보고 싶습니다.

    “만약 십자가가 사라진다면, 그 예배는 여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교회 건물 안에 십자가가 걸려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살아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십자가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9)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선함 때문이 아닙니다.

    열심 때문도 아니고, 신앙 경력이 길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의 은혜 때문입니다.

    만약 십자가가 빠진다면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위로하는 시간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감동은 있을 수 있습니다.

    눈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감동이 반드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정, 그리고 10년의 시간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십자가 없는 기도는 쉽게 자기중심이 됩니다

    기도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도에는 자연스럽게 회개가 포함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반대로 십자가가 사라지면 기도는 점점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십자가는 장식이 아니라 중심입니다

    교회 안에 십자가가 걸려 있다고 해서 반드시 십자가 중심의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와 기도,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십자가가 살아 있는가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정말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가?”

    “정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십자가는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메시지가 아니라 변화시키는 메시지입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49527

    십자가는 시간을 넘어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예배를 드리는 한 시간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면, 월요일의 삶에서도 그 십자가가 우리의 선택을 바꾸어야 합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용서를 선택하고,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정직을 선택하며,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내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것.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가 됩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과거에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상징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그대로 붙잡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 받은 은혜가 삶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내 뜻만 고집한다면, 십자가는 여전히 우리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가 끝난 후부터 시작됩니다.

    교회 문을 나선 뒤에도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십자가를 비추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강조하면 너무 무겁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사역은 결코 십자가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선명하게 보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갑니다.


    십자가가 사라질 때 나타나는 모습

    십자가가 약해질수록 사람은 불편함을 피하려고 합니다.

    회개보다 공감이 중요해지고,

    거룩보다 편안함이 우선되며,

    순종보다 자기 이해가 강조됩니다.

    물론 공감도 중요하고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위로는 영혼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죄를 직면하게 하고, 은혜를 발견하게 하며,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교회의 모습이 변한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을 구하는 사람,

    화려한 무대보다 골방의 기도를 선택하는 사람,

    자신의 의가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붙드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진정한 예배는 완벽한 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드는 한 사람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

    “십자가는 예배의 장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예배가 살아 있으려면, 우리의 기도가 살아 있으려면, 언제나 십자가가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 십자가 앞에서 수치는 은혜가 되고, 상처는 새로운 삶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수치는 은혜가 되고, 상처는 새로운 삶이 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십자가를 생각하면 용서와 사랑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정작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새롭게 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벗겨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써 감추고 있던 모습,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모습,
    사람들에게는 물론 하나님께도 숨기고 싶었던 모습까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은혜의 자리인 동시에 수치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바로 그 수치의 자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 옷을 입히십니다.

    변명할 말이 사라지는 순간

    처음에는 누구나 자신을 변호하려고 합니다.

    “이건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십자가 앞에 오래 머물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변명이 힘을 잃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주님,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은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손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를 붙드시기 시작하십니다.



    *행복은 왜 돈만으로 결정되지 않을까? 돈과 행복의 진짜 관계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

    • AI 생성 이미지 (제작: ChatGPT)

    주님의 시선이 정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신도 모르게 재판관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실망한 아버지,
    엄격한 검사,
    잘못을 지적하는 심판자의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다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모습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실패도,
    넘어짐도,
    감추어진 마음도,
    상처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수치의 성질이 달라집니다.

    숨고 싶은 마음이 내려놓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주님께 머물고 싶은 마음으로 바뀝니다.

    수치가 은혜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벗겨졌는데도 버려지지 않았다는 경험

    인간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났을 때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꾸미고,
    포장하고,
    증명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는데도
    주님이 떠나지 않으시는 경험입니다.

    벗겨졌는데도 품어 주시고,
    연약함이 드러났는데도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이래도 사랑받는구나.”

    은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입히시는 새 옷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옷을 더 훌륭한 모습으로 생각합니다.

    성공한 사람,
    흠 없는 사람,
    실수하지 않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입히시는 새 옷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의의 옷

    의의 옷은 완벽함의 옷이 아닙니다.

    “이제 너는 절대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약속이 아니라,

    “실수해도 너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

    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 옷을 입은 사람은 남을 쉽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신 또한 은혜로 덮인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옷

    진짜 겸손은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미 나를 아신다.”

    라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조용해집니다.

    목소리는 낮아지지만,
    존재감은 더 깊어집니다.

    긍휼의 옷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본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별은 하지만 냉혹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지만 잔인하지 않으며,

    선을 지키지만 우월감을 갖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입히시는 긍휼의 옷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벗지 않아도 되는 옷

    하나님이 입히시는 새 옷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옷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벗지 않아도 되는 옷입니다.

    이 옷을 입은 사람은 더 이상 사람들의 인정에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박수에 취하지도 않고,
    오해에 쉽게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깊은 곳에서 이미 하나님께 덮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먼저 벌거벗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벗겨진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의의 옷과 겸손의 옷, 그리고 긍휼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목적은 수치가 아닙니다.

    수치를 지나 은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이제는 숨지 않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이미 덮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 십자가를 구하지 않는 이유

    십자가를 구하지 않는 이유

    벗겨짐의 수치를 지나 새 옷을 입기까지

    사람들은 흔히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십자가 앞으로 깊이 나아가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왜일까요?

    십자가가 우리를 위로하기 전에 먼저 벗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은 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민낯은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때로 은혜보다 먼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십자가는 나를 보호하던 옷을 벗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겹의 옷을 입습니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

    “저 사람보다는 낫지.”

    “나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잖아.”

    이런 생각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는 옷과 같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서면 이 옷들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공로도,
    변명도,
    억울함도,
    종교적인 자부심도,

    심지어 내가 선한 의도로 했던 일들조차
    십자가의 빛 앞에서는 더 이상 나를 가려 주지 못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단순히 죄인으로 드러내기 전에,
    먼저 벌거벗은 존재로 세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이시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 AI 생성 이미지 (제작: ChatGPT)


    수치심은 인간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수치심을 더 힘들어할 때가 많습니다.

    상처는 견딜 수 있어도
    수치는 숨고 싶게 만듭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변명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치심은 인간을 숨게 만듭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가 애써 만들었던 가리개를 벗겨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보여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감추고 싶은 부분이
    주님께서 만지기를 원하시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4501

    십자가가 어려운 이유는 즉시 새 옷을 입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벗기는 순간과 입히는 순간 사이에
    잠시의 틈을 허락하십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자신의 능력도,

    사람들의 인정도,

    지금까지 쌓아 온 신앙 경력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모두 내려놓은 채
    오직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돌아섭니다.

    진실하게 드러나는 것보다
    차라리 적당히 감추고 살아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틈을 통해
    우리가 진짜 의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그 수치의 자리가 은혜의 시작이다

    놀랍게도 십자가는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치의 종말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수치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이 수치를 감당하신 이유는
    우리가 평생 숨으며 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결국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님,
    꾸미지 않은 저를 사랑하시는군요.

    잘 포장된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 주시는군요.”

    그 순간 수치는 은혜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구하는 사람의 선택

    십자가를 구하는 사람은 특별히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이상 자신을 붙들 힘이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심을 피하는 대신 진실을 선택합니다.

    자기 보호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덮으심을 기다립니다.

    스스로 새 옷을 만들어 입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입혀 주실 옷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용기라기보다 신뢰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믿음의 가장 깊은 모습은
    바로 이 신뢰인지도 모릅니다.



    마무리

    십자가는 우리를 망가뜨리기 위해 벌거벗기지 않습니다.

    새 옷을 입히기 위해 벗기십니다.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 가리개를 벗기십니다.

    우리가 평생 숨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감추어진 곳까지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결국 알게 됩니다.

    “주님은 나를 부끄럽게 하려고 벗기신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입히시기 위해 벗기셨구나.”

    그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
    수치는 은혜가 되고
    두려움은 신뢰가 되며
    십자가는 더 이상 형벌의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자리가 됩니다.
    🌿✝️

    “십자가는 나를 새 옷으로 입히기 위해 잠시 벌거벗기신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십자가를 떠날 수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벗겨짐의 시간을 지나 새 옷을 입게 하소서

    주님,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정작 내 삶에 십자가가 찾아오는 것은 두려워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면서도
    내 자존심이 내려놓아지는 것은 싫어하고,
    내 뜻이 꺾이는 것은 힘들어하며,
    내 안에 감추어 두었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고난을 견디는 자리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옛사람이 벗겨지는 자리이며,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더욱 깊이 의지하게 되는 자리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내가 십자가를 구하지 않았던 이유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혹시 내가 편안함만을 원했던 것은 아닌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닌지,
    내 자존심과 내 뜻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옵소서.

    벗겨짐의 시간이 찾아올 때
    그것을 실패라고만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수치스럽고 아픈 순간에도
    주님께서 나를 새롭게 빚어 가고 계심을 믿게 하옵소서.

    사람들에게 오해받을 때에도,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질 때에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날 때에도
    주님을 원망하기보다
    그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묻게 하옵소서.

    주님,
    내 안에 있는 교만을 벗겨 주시고
    내 안에 있는 자기중심성을 벗겨 주시며
    사람의 인정에 대한 집착과
    내 뜻대로 살아가려는 마음도 벗겨 주옵소서.

    때로는 그것이 아프고 부끄럽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도망치지 않게 하옵소서.

    벗겨짐 뒤에는
    주님께서 준비하신 새 옷이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입게 하시고,
    내 자랑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게 하시며,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내가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하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무엇을 새롭게 입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벗겨짐의 시간이 끝난 뒤
    내가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서게 하옵소서.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게 하시고,
    낮아짐을 통해 다른 사람을 품게 하시며,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누군가에게 은혜를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십자가를 통해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삶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내 안의 옛 옷을 벗고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새 옷을 입게 하옵소서.

    그리고 언젠가 뒤돌아보며
    내가 가장 힘들고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이
    사실은 주님께서 나를 가장 깊이 만지시고
    새롭게 빚으셨던 은혜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