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newznls6857

  • 악인의 결말, 그리고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것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마음이 답답해질 때가 있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고,
    불의한 사람이 오히려 형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특히 사회와 나라의 여러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정말 하나님은 보고 계실까?”
    “악은 왜 이렇게 오래 버티는 걸까?”

    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올라오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악인의 번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악인이 한때 성공하고 형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향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사람이 지나갈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시편 37:35-36)

    악인은 거대한 나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권력도 있고,
    재물도 있고,
    사람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번영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크고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악은 결국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성경은 악이 단순히 남을 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악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가 판 웅덩이에 자기가 빠졌도다.”
    (시편 7:15)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고,

    불의는 또 다른 불의를 낳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향해 던진 칼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칼은 자신을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악은 언젠가 스스로 무너집니다.


    최종적인 심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을 심판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성경은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시편 7:11)

    세상의 법망을 피할 수도 있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선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감춰진 것이 없습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누가복음 8:17)

    그래서 믿는 사람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며 기다리는 법을 배워 갑니다.


    악인의 길은 결국 망합니다

    시편 1편은 의인과 악인의 마지막을 비교합니다.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여기서 말하는 망함은 단순한 실패나 가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이 결국 도달하게 되는 종착지를 말합니다.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하나님 없는 길은 생명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악이 영원히 존재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보여 줍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거짓도,
    억압도,
    눈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요한계시록 21:4)

    악은 잠시 세상을 흔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놀라운 사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저 사람이 악인이다”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모두를 향해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우리는 종종 악인을 세상 어딘가에 있는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이야기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한 사람은 핍박자였고,

    한 사람은 배신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단지 심판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회개하게 하셨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악인의 결말은 사실 두 갈래로 나뉩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인의 결말은 단순히 멸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사람

    • 자신의 죄를 붙들고 살아감
    • 하나님을 거부함
    •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
    • 악인의 길은 망함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

    • 자신의 죄를 인정함
    • 회개함
    • 십자가의 은혜를 붙듦
    • 새 생명을 얻음

    하나님은 어떤 길을 더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에스겔 33장 11절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 줍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하나님은 심판을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의 멸망보다도
    악인이 변화되는 은혜를 더 크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며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왜 악한 사람은 잘되는 것 같고,
    왜 정의는 더디게 오는 것처럼 보일까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악인의 형통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늦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또한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분노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공의를 신뢰하고,
    은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람을 향한 정죄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며,

    동시에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결국 역사의 마지막 주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에스겔 33:11)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그 사실이 오늘 우리의 분노를 인내로,
    답답함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기를 소망합니다.
    🙏🏻✨

  •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의 가치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의 가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죄의 크기에 집중합니다.

    어떤 죄가 더 크고,
    어떤 죄가 더 심각한지,
    누가 더 의롭고 누가 더 부족한지를 따져 보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죄의 경중보다도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성경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완벽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했고,
    모세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다윗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불렸지만,
    인생의 한 시점에서는 매우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킬 수 있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실패가 아니라 은혜의 시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를 실패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숨기고,
    실수를 변명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회개는 실패의 끝이 아니라 은혜의 시작입니다.

    회개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가를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은 강한 사람보다 부드러운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보다도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마음에는 역사하시기 어렵지만,
    겸손한 마음에는 은혜를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상한 마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만,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했을 때 하나님께 돌아올 줄 아는 사람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점점 굳어지면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잘못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살아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말씀 한 구절에도 마음이 찔리고,
    작은 잘못에도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

    그것은 연약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가장 소중한 영적 자산

    세상은 능력과 성취를 가치 있게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른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것은
    언제든지 자신을 낮추고,
    언제든지 말씀 앞에 서며,
    언제든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소중한 영적 자산은
    지식도, 경험도, 능력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있는 한 사람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실수해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길을 잃어도 다시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며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령님의 음성에 반응하며,
    잘못을 깨달을 때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 말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지 않고,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남아 있기를 소망합니다.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 죄를 지은 사람과 악인은 같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과 악인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을 판단할 때 그가 저지른 행동만을 보고 결론을 내립니다.

    큰 죄를 지으면 악인이라 부르고,
    실수가 적으면 선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조금 다른 시선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어떤 행동 하나만으로 사람을 규정하기보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중요하게 바라봅니다.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

    성경에는 분명 죄를 지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다윗 역시 간음과 살인이라는 무거운 죄를 범했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이들은 결코 가볍지 않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졌을 때
    그들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무릎을 꿇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통곡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책망 앞에서 죄를 인정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죄가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악인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반대로 성경이 말하는 악인은 단순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대하는 태도에서 악인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악인은 빛을 미워합니다.

    진리가 자신을 비추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악인은 자신의 죄를 정당화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변명하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립니다.

    악인은 회개보다 권력과 자존심을 붙듭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기보다
    끝까지 스스로를 지키려 합니다.

    그래서 악인의 가장 큰 문제는 죄 자체보다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성경이 보는 진짜 기준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가 더 큰 죄를 지었는가?”

    하지만 성경은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이것이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사람이 악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사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차이

    결국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죄의 크기가 아닙니다.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습니다.

    의인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의인은 넘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사람입니다.

    반면 악인은 자신의 죄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완벽한 사람을 의인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말씀 앞에서 돌이키며,
    은혜를 붙드는 사람을 의인의 길에 있는 사람으로 보여 줍니다.

    오늘도 우리는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를 다시 주님께로 이끄는 은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 느림의 미학, 서두르지 않을 때 보이는 것들

    느림의 미학, 서두르지 않을 때 보이는 것들

    우리는 늘 빠름을 요구받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더 빨리 결정해야 하고,
    더 빨리 성과를 내야 하며,
    더 빨리 원하는 곳에 도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느리다’는 말이 마치 부족함이나 뒤처짐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삶을 조금 더 오래 살아보니,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대부분 느린 시간을 통과하며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느림의 미학’ 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천천히 걸을 때는 눈에 들어옵니다.

    바쁘게 살아갈 때는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의 상태가
    잠시 멈추어 설 때 비로소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둘러 결과만 바라볼 때는 보이지 않던 표정과 마음이,
    천천히 함께 걸을 때는 보이기 시작합니다.

    느림은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깊이 바라보게 하는 시선의 변화입니다.

    느림은 깊이를 만들어 냅니다

    급하게 읽은 책의 내용은 금세 잊어버리지만,
    오랫동안 곱씹으며 읽은 문장은 마음속에 오래 남습니다.

    급히 마신 차 한 잔과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마신 차 한 잔은
    같은 차일지라도 전혀 다른 경험이 됩니다.

    삶도 그렇습니다.

    빠르게 소비하는 삶은 흔적을 남기기 어렵지만,
    천천히 경험한 삶은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듭니다.

    느림은 경험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체화되게 합니다.

    느림은 존재를 회복시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결과로 평가합니다.

    얼마나 이루었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얼마나 인정받았는지를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느림의 시간 속에서는 질문이 달라집니다.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데려갑니다.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으로서의 나,
    성과 이전에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느림은 단순한 생활 방식이 아니라
    존재를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성숙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씨앗은 하루아침에 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관계도 하루 만에 깊어지지 않습니다.

    상처 역시 단번에 아물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원하는 속도가 아니라
    우리를 가장 아름답게 빚어 가실 수 있는 속도로 일하십니다.

    그 과정은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진짜 변화는 대부분 느립니다.

    그러나 느리기 때문에 더 깊고,
    느리기 때문에 더 단단합니다.

    느림의 미학

    우리는 때때로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납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빠르게 해결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 속에서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느림은 뒤처짐이 아닙니다.

    느림은 포기가 아닙니다.

    느림은 인생을 더 깊이 바라보고,
    자신을 더 온전히 만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지혜입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느린 시간이
    낭비되고 있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준비하고 계시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간을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느림은 비효율이 아니라 성숙의 속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느림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 🍀✨

  • 엄마도 몰라서 묻는다

    엄마도 몰라서 묻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얼마 전 힘들어하는 큰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아이는 답답해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언제쯤 이 시간이 지나갈지 알 수 없어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제 입에서 한마디가 나왔습니다.

    “엄마도 몰라서 하나님께 묻는단다.”

    아이에게는 짧은 말이었지만, 돌아보니 그 안에는 제 인생의 많은 시간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언제나 길을 물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도 몰랐고, 가정을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도 몰랐고, 자녀를 키우면서도 몰랐습니다.
    그럴 때 마다 제 힘으로 제 지혜로 하려고 했습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지금 하는 결정이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날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다 제 힘과 지혜라는 것이 얼마나 한없이 부족한 것인 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님은 보고 계시니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돌아보면 제 인생은 제가 답을 잘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모를 때마다 하나님께 물으며 걸어온 시간이 쌓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그 말을 해 주고 난 후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과거의 간증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엄마도 몰라서 하나님께 묻는단다.”

    이 말은 사실 지금의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전히 모르는 길 앞에 서 있습니다.

    여전히 기다려야 하는 문제들이 있고, 여전히 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들을 지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믿음이 깊어지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것은 믿음이란 모든 답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믿음은 답을 모르면서도 하나님께 묻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계산하고, 더 많이 준비하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저는 이 말씀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아도 그분께 길을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예전과 같은 질문입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제가 알지 못하니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시오.”

    아이에게 했던 말이 다시 제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엄마도 몰라서 하나님께 묻는단다.”

    그리고 그 말 뒤에 이제 한 문장을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엄마는 지금도 하나님께 물어보고 있단다.”

    어쩌면 믿음의 사람은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길을 아시는 분께 계속 묻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압니다.

    제가 모르더라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제 손을 잡고 한 걸음만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

  • 사람들의 오해보다 주님의 인정

    사람들의 오해보다 주님의 인정

    살다 보면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오해를 받는 일입니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내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애썼습니다.
    내 진심을 설명하고,
    내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 가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해받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조차 오해할 수 있는데,
    모든 사람의 생각과 판단을 바꾸려 애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내 행동만 보지만,
    주님은 내 마음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결과만 보지만,
    주님은 그 과정 속에서 흘린 눈물과 기도도 아십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판단하지만,
    주님은 말하지 못한 마음의 무게까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전만큼 오해가 두렵지 않습니다.

    물론 여전히 마음은 아픕니다.
    오해를 받으면 속상하고 억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감정 속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가장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의 박수를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은 때로 변합니다.

    오늘은 칭찬하다가도 내일은 비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시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점점 더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주님,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주님께서 저를 어떻게 보시는지가 더 중요하게 해 주세요.”

    사람들의 오해를 모두 바로잡을 수는 없지만,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모두 바꿀 수는 없지만,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셨는가”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의 인정보다
    주님의 인정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고백해 봅니다.

    “주님이 아시니까 괜찮습니다.” 🙏🏻✨

  • 십자가의 은혜로 새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

    십자가의 은혜로 새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새 옷을 입었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많은 사람들은 변화된 삶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부터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기보다, 어디를 향해 살아갈 것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새 옷을 입었다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정렬되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새 옷을 입은 사람은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할까요?

    다시 자기 증명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삶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내가 경건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내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내가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미 우리에게 선언했습니다.

    “너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내가 너를 입혔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은 사람들의 인정에 목숨 걸지 않습니다.

    오해를 받아도 무너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해도 흔들리지 않으며,
    항상 자신을 변호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관심이나 체념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서 얻는 가장 깊은 자유입니다.


    행동보다 머무름을 우선하는 삶

    우리는 늘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님,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십자가 앞에 머물고 있는가?

    말씀 안에 머물고 있는가?

    내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 아래 머물고 있는가?

    머무름이 무너지면 행동은 다시 자기중심성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은 열심의 양보다 중심의 방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과보다 관계를,
    활동보다 동행을,
    분주함보다 머무름을 선택합니다.


    분별하되 자신을 높이지 않는 삶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분별력이 생깁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하나님 뜻이고 무엇이 아닌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진짜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분별이 생길수록 더 겸손해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말하지만 정죄하지 않고,

    잘못을 지적하지만 상대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경계를 세우지만 사랑의 문까지 닫아 버리지는 않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낮추면서도 강하게 만듭니다.


    다시 벗겨질 각오로 사는 삶

    새 옷을 입었다고 해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다루실 부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 안의 깊은 곳을 만지십니다.

    감추고 싶었던 상처,
    놓지 못했던 자존심,
    여전히 붙들고 있는 자기중심성을 드러내십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성숙한 신앙은 완벽함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또다시 나를 벗기실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데 있습니다.

    “주님, 아프더라도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이 고백이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새로워집니다.


    은혜를 소유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삶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새 옷은 전시용이 아닙니다.

    그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도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 곁에는 특별한 분위기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고,

    실패를 숨기지 않으며,

    정죄보다 회복을 기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이 말없이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넘어졌고,
    나도 벗겨졌고,
    나도 은혜로 살았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갈 줄 아는 사람

    십자가의 은혜로 새 옷을 입은 사람의 삶은 흠 없는 삶이 아닙니다.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다릅니다.

    그는 다시 십자가로 돌아갈 줄 압니다.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신앙은 점점 더 조용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 깊어지고,
    더 단단해지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향기로 변해 갑니다.

    결국 십자가의 은혜로 새 옷을 입은 사람의 목표는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통해 오늘도 누군가를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

  • 십자가 앞에서 수치가 은혜로 바뀌는 순간

    십자가 앞에서 수치가 은혜로 바뀌는 순간

    사람들은 보통 십자가를 생각하면 용서와 사랑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정작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새롭게 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벗겨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써 감추고 있던 모습,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모습,
    사람들에게는 물론 하나님께도 숨기고 싶었던 모습까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은혜의 자리인 동시에 수치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바로 그 수치의 자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 옷을 입히십니다.

    변명할 말이 사라지는 순간

    처음에는 누구나 자신을 변호하려고 합니다.

    “이건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십자가 앞에 오래 머물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변명이 힘을 잃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주님,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은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손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를 붙드시기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시선이 정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신도 모르게 재판관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실망한 아버지,
    엄격한 검사,
    잘못을 지적하는 심판자의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다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모습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실패도,
    넘어짐도,
    감추어진 마음도,
    상처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수치의 성질이 달라집니다.

    숨고 싶은 마음이 내려놓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주님께 머물고 싶은 마음으로 바뀝니다.

    수치가 은혜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벗겨졌는데도 버려지지 않았다는 경험

    인간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났을 때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꾸미고,
    포장하고,
    증명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합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는데도
    주님이 떠나지 않으시는 경험입니다.

    벗겨졌는데도 품어 주시고,
    연약함이 드러났는데도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이래도 사랑받는구나.”

    은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입히시는 새 옷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옷을 더 훌륭한 모습으로 생각합니다.

    성공한 사람,
    흠 없는 사람,
    실수하지 않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입히시는 새 옷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의의 옷

    의의 옷은 완벽함의 옷이 아닙니다.

    “이제 너는 절대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약속이 아니라,

    “실수해도 너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

    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 옷을 입은 사람은 남을 쉽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신 또한 은혜로 덮인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옷

    진짜 겸손은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미 나를 아신다.”

    라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조용해집니다.

    목소리는 낮아지지만,
    존재감은 더 깊어집니다.

    긍휼의 옷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본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별은 하지만 냉혹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지만 잔인하지 않으며,

    선을 지키지만 우월감을 갖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입히시는 긍휼의 옷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벗지 않아도 되는 옷

    하나님이 입히시는 새 옷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옷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벗지 않아도 되는 옷입니다.

    이 옷을 입은 사람은 더 이상 사람들의 인정에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박수에 취하지도 않고,
    오해에 쉽게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깊은 곳에서 이미 하나님께 덮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먼저 벌거벗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벗겨진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의의 옷과 겸손의 옷, 그리고 긍휼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목적은 수치가 아닙니다.

    수치를 지나 은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이제는 숨지 않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이미 덮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 십자가를 구하지 않는 이유

    십자가를 구하지 않는 이유

    벗겨짐의 수치를 지나 새 옷을 입기까지

    사람들은 흔히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십자가 앞으로 깊이 나아가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왜일까요?

    십자가가 우리를 위로하기 전에 먼저 벗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은 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민낯은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때로 은혜보다 먼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십자가는 나를 보호하던 옷을 벗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겹의 옷을 입습니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

    “저 사람보다는 낫지.”

    “나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잖아.”

    이런 생각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는 옷과 같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서면 이 옷들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공로도,
    변명도,
    억울함도,
    종교적인 자부심도,

    심지어 내가 선한 의도로 했던 일들조차
    십자가의 빛 앞에서는 더 이상 나를 가려 주지 못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단순히 죄인으로 드러내기 전에,
    먼저 벌거벗은 존재로 세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수치심은 인간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수치심을 더 힘들어할 때가 많습니다.

    상처는 견딜 수 있어도
    수치는 숨고 싶게 만듭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변명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치심은 인간을 숨게 만듭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가 애써 만들었던 가리개를 벗겨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보여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감추고 싶은 부분이
    주님께서 만지기를 원하시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십자가가 어려운 이유는 즉시 새 옷을 입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벗기는 순간과 입히는 순간 사이에
    잠시의 틈을 허락하십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자신의 능력도,

    사람들의 인정도,

    지금까지 쌓아 온 신앙 경력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모두 내려놓은 채
    오직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돌아섭니다.

    진실하게 드러나는 것보다
    차라리 적당히 감추고 살아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틈을 통해
    우리가 진짜 의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그 수치의 자리가 은혜의 시작이다

    놀랍게도 십자가는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치의 종말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수치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이 수치를 감당하신 이유는
    우리가 평생 숨으며 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결국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님,
    꾸미지 않은 저를 사랑하시는군요.

    잘 포장된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 주시는군요.”

    그 순간 수치는 은혜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구하는 사람의 선택

    십자가를 구하는 사람은 특별히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이상 자신을 붙들 힘이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심을 피하는 대신 진실을 선택합니다.

    자기 보호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덮으심을 기다립니다.

    스스로 새 옷을 만들어 입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입혀 주실 옷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용기라기보다 신뢰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믿음의 가장 깊은 모습은
    바로 이 신뢰인지도 모릅니다.

    마무리

    십자가는 우리를 망가뜨리기 위해 벌거벗기지 않습니다.

    새 옷을 입히기 위해 벗기십니다.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 가리개를 벗기십니다.

    우리가 평생 숨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감추어진 곳까지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결국 알게 됩니다.

    “주님은 나를 부끄럽게 하려고 벗기신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입히시기 위해 벗기셨구나.”

    그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
    수치는 은혜가 되고
    두려움은 신뢰가 되며
    십자가는 더 이상 형벌의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자리가 됩니다.
    🌿✝️

    “십자가는 나를 새 옷으로 입히기 위해 잠시 벌거벗기신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십자가를 떠날 수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 주님이시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주님이시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자기중심성이 무너질 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 생각에 동의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었음을 말입니다.

    기도도 했고,
    말씀도 읽었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 아니라
    내 뜻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을 구하고 있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상하게도
    우리가 원하는 답을 빨리 주시기보다,
    우리 안에 있는 자기중심성을 드러내시는 일을 먼저 하십니다.

    그 과정은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왜 제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오히려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정말 내 뜻을 구하고 있느냐,
    아니면 네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냐?”

    그 질문 앞에 서면
    우리는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자기중심성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시라면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네가 틀렸다는 것을 먼저 알려 주려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나를 더 깊이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길이 막히고,
    생각대로 되지 않고,
    기대했던 응답이 늦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멀어지셨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붙들고 있던 중심이
    주님인지 나 자신인지 보여 주시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이 무너질 때 나타나는 가장 큰 신호는
    정답을 주장하던 사람이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왜?”라고 따지던 사람이

    “주님,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습니까?”라고 묻기 시작합니다.

    “이게 맞습니다.”라고 말하던 사람이

    “주님은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신앙의 성장은
    더 많은 것을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내 문제를 보는 눈,
    사람을 바라보는 눈,
    나라를 바라보는 눈,
    교회를 바라보는 눈이

    점점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성이 무너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은혜의 시작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게 되는 순간,

    비로소 주님이 일하실 자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시라면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네가 나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나와 함께 걸어가기를 원한다.

    네 생각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자리에 내가 서겠다.”

    우리가 평생 가야 할 길은
    완벽하게 하나님 중심이 되는 길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