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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바라보다!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바라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다!


    엊그제 하나님 바라보다! 라는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처음으로 제 마음속에 있었던 이야기를 남편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동안 남편과 심한 갈등이 있을 때 제 안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생각들과 어떻게 싸웠는지를 처음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꺼내면서 저도 지난 시간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남편과의 갈등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제게 더 힘들었던 것은 갈등이 반복될 때마다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당신을 보면서 소망이 없었던 때가 있었어”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사실 당신한테 이런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것 같아.”

    그리고 남편과 갈등이 심했던 때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하고 갈등이 심할 때마다 내 안에서 이런 생각들이 올라왔어.”

    “저 사람은 안 돼.”

    “진짜 구제불능이야.”

    “이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서 저도 제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남편에게 화가 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더 깊은 곳에는 남편에 대한 소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갈등이 반복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어.’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야.’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남편이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부정적으로 보였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까지 다시 떠올랐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 미리 판단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저는 남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 대해 제가 만들어 놓은 생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저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내게 맡겨라.”

    저에게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붙들고 있던 남편과 아이들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맡기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보면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남편을 보면 낙심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을 바라보면 ‘정말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정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라고 하셨으니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지나면 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또 흔들리면 다시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간을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더 놓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 가정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에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정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넘어, 우리 가정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정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을 배우고,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이 가정을 믿음의 가정으로 세워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남편이 변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마음 때문에 제가 더 힘들어졌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제가 남편을 붙들고 있었고, 제가 가정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제가 어떻게든 가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보다 제가 앞서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싸우기 전에 내 생각과 싸워야 했어”

    남편과 이야기를 계속 나누면서 저는 영적전쟁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나는 영적전쟁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닌 것 같아.”

    “사람하고 싸우는 게 먼저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하고 먼저 싸워야 하는 것 같아.”

    남편과 갈등이 생기면 상대방의 말과 행동만 보게 됩니다.

    왜 저렇게 말하는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왜 나를 힘들게 하는지 생각합니다.

    물론 상대방이 잘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상처를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제 마음속에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 사람은 안 돼.’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소망이 없어.’

    이런 생각을 계속 품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 생각이 제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과 싸우기 전에 먼저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생각과 싸우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그 생각들과 싸웠을까요?

    제 생각을 억지로 없애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생각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았습니다.

    ‘저 사람은 안 돼.’

    라는 생각이 올라오면,

    ‘그래도 하나님께 맡기자.’

    라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이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들면,

    ‘내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야.’

    라고 제 마음을 돌렸습니다.

    ‘우리 가정에는 소망이 없어.’

    라는 생각이 들면,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도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야.’

    라고 다시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현실이 당장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믿음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6462




    하나님께서는 남편보다 먼저 제 마음을 다루셨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변해야 가정이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의 생각이 달라지고,

    남편의 행동이 달라지고,

    남편이 가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먼저 제 마음을 다루셨습니다.

    남편을 바라보던 제 눈을 제 자신에게 돌리셨습니다.

    ‘남편이 어떻게 하느냐’보다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를 보게 하셨습니다.

    남편의 잘못을 바라보느라 보지 못했던 제 안의 판단과 분노와 낙심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었는지도 알게 하셨습니다.

    그때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남편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하나님보다 내가 더 붙들고 있지 않는 것이구나.


    맡긴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정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내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미래를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아이들의 삶을 내가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진짜 맡김이라는 것을 조금씩 배워갔습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은 모든 상황이 좋아졌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을 바라보면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가정을 바라보면 막막했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다시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자.’

    그렇게 하루를 지나고 또 하루를 지나며 다시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제가 강해서 버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밖에 바라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제가 배운 영적전쟁입니다

    예전에는 영적전쟁이라고 하면 아주 크고 특별한 것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제게 가장 치열했던 영적전쟁은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남편과 갈등이 있었던 순간,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왔던 순간,

    과거의 상처가 다시 떠올랐던 순간,

    ‘이제는 소망이 없어.’

    라는 생각이 들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그 생각을 붙들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가져갈 것인가.

    사람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볼 것인가.

    내 판단을 붙들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것인가.

    저는 오랜 시간 그 싸움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남편보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고 싶습니다

    엊그제 남편에게 그동안의 제 마음을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묘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다시 보였지만,

    동시에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붙들고 계셨는지도 보였습니다.

    제가 말씀을 붙든 것 같았지만,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제 마음을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붙든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저를 놓지 않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고 싶습니다.

    남편의 모습이 제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때에도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고 싶습니다.

    가정의 현실이 기대와 다를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될 때에도 하나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속에 다시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 그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께 가지고 가고 싶습니다.


    오늘도 다시 맡기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 가정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남편이 어떻게 변화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압니다.

    제가 하나님보다 앞서서 모든 것을 붙들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맡기라고 하셨다면 맡기면 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제게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다시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안 돼.’

    라는 생각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소망이 없어.’

    라는 생각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하나님,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주님께 맡깁니다.’

    라고 다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영적전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마음에서 시작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내 힘으로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눈앞의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사람의 변화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합니다.

    내가 붙들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을 살아갑니다.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걷습니다.

  • 천국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 |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삶

    천국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 |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삶

    얼마 전 아는 지인에게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정말 잘됐다.”
    “부럽다.”
    “축하해.”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함께 기뻤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살아온 시간과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아가겠다는 삶의 방향과도 연결되어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미국 시민권을 그렇게 부러워할까?”

    그리고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조금 다른 질문에 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시민인가?”


    미국 시민권보다 더 귀한 시민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신분을 갖게 됩니다.

    어느 나라의 국민인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것을 이루었는지에 따라 자신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좋은 직장을 얻거나, 좋은 집을 마련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이루면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미국 시민권 역시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것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제 마음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마음에 떠오른 것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천국 시민권입니다.

    미국 시민권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의 신분입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다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도 이어지는 영원한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 빌립보서 3:20

    이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내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상관없습니다

    물론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좋은 집도 감사하고,
    좋은 직장도 감사하고,
    경제적인 여유도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그곳에서 견딜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 좋은 곳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평범한 하루도 은혜가 되고,

    하나님과 함께라면 어려운 길에서도 걸어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큰 복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하고,
    환경이 바뀌기를 기도하고,
    좋은 것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그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문제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더 중요하고,

    환경이 바뀌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가운데 평안을 얻기도 하고,

    막막한 가운데 한 걸음을 내딛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기보다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이 블로그를 시작하고 글을 하나씩 써 내려가면서 저에게도 한 가지 마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아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어떻게 만나 주셨는지,

    어떻게 기다려 주셨는지,

    어떻게 다시 일으켜 주셨는지,

    그리고 힘든 순간에도 어떻게 함께 걸어 주셨는지를 기록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음이 흔들리고,

    때로는 걱정하고,

    때로는 하나님보다 눈앞의 상황을 더 크게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붙잡은 것 같지만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저를 붙들고 계셨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러 있는 블로그가 아니라

    저는 이 블로그가 단순히 글이 많이 쌓여 있는 공간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좋은 글을 많이 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을 찾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든 하루를 보내다가 우연히 이곳에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왔지만 너무 지쳐서 기도조차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 글 하나를 읽다가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으셨구나.”

    그렇게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긴 글을 다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한 문장만 마음에 남아도 괜찮습니다.

    한 구절의 말씀만 기억해도 괜찮습니다.

    그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 다시 하나님을 바라볼 힘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내 결심만으로는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91694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우리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내가 위로받았다면 누군가를 위로하고,

    내가 용서받았다면 누군가를 용서하고,

    내가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경험했다면 나도 누군가를 기다려 주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완벽하게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작은 사랑이라도 괜찮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누군가를 위해 드리는 기도 한 번,

    상처 입은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마음 하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하신 일을 솔직하게 나누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곳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 블로그에 저의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합니다.

    잘된 이야기만 기록하지 않고,

    힘들었던 이야기도 기록하고,

    넘어졌던 이야기도 기록하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던 순간도 기록하고,

    그런 가운데 결국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도 기록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기다림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멈추게 하심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길을 걷게 하심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알게 됩니다.

    그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셨다는 것을.

    그래서 이곳의 글들이 누군가에게 작은 길잡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바라봐야겠다.”

    “하나님께 다시 기도해 봐야겠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어봐야겠다.”

    그런 마음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라도 생긴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나는 천국 시민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시작된 작은 생각이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시민권도 있지만,

    내게는 그보다 더 귀한 시민권이 있습니다.

    천국 시민권입니다.

    나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이 땅에만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어디에 살든,

    어떤 환경에 있든,

    어떤 상황을 지나가든,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미국이든 한국이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시는 곳이라면 그곳이 좋습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만 간직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이 블로그를 찾아오는 한 사람에게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길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

    이 이름처럼 이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고 싶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지금 걷고 있는 길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고,

    앞으로 걸어갈 길도 하나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길에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저에게서 멈추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러 있는 블로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블로그.

    그것이 제가 이곳에 바라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이 땅을 살아가지만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나는 천국 시민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걷습니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 내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 내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이 이미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이 부분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성경을 많이 알게 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설교를 듣고, 신앙에 관한 여러 책을 읽으면서 성경적인 지식이 쌓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 성경을 연구하여 상당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 가운데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영적인 체험이나 은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내가 이미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굳어질 때 시작됩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때로는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과 신앙의 경험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운 신앙의 기준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준을 넘어 말씀하실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는 하나님을 안다”는 생각이 하나님을 더 알아가려는 마음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하나의 견고한 진이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실 거야.”

    “성경적으로 이것이 맞으니까 하나님도 당연히 이렇게 말씀하실 거야.”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말씀을 하셔도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그렇게 점점 견고해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그 견고한 생각이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가르치시는 것조차 막아버리는 견고한 진처럼 작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 지식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만이 아닙니다.

    “주님, 제가 아직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가르쳐 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책을 통해 지식으로만 알아가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인격체이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자신을 분명하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성경 말씀과 별개의 특별한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고, 그 말씀을 통해 오늘 나의 삶 가운데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겸손하게 분별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더 이상 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경에 대한 지식은 남아 있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깊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데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훈련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65603


    저의 남편과의 신앙 갈등을 돌아보며

    저에게는 남편과 오랜 시간 신앙적인 갈등을 겪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갈등의 중심에는 단순히 서로의 성격이나 의견 차이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 남편은 성경에 대해서는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알고 있었고, 성경에 대한 이해도 깊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지식이 때로는 인격체 되신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데 어려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성경적 지식과 자신의 판단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하시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는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남편만의 문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제 생각과 감정,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려 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서로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길 때, 신앙을 함께한다는 것이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갈등까지도 사용하셔서 우리를 빚어 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을 빚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 남편을 변화시켜 주세요.”

    “주님, 저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주세요.”

    “주님, 이 상황을 해결해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상황을 먼저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통하여 우리의 성품을 빚어 가십니다.

    저는 남편과의 신앙 갈등을 지나면서 이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성품만 빚으신 것이 아니라 제 성품도 함께 다루고 계셨습니다.

    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마음도 내려놓게 하셨고,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나 자신이 다루어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내 고집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도 내 뜻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내가 원하는 말만 들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손에 성품이 빚어져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문제는 단순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라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게는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배우려고 하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을 바꾸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놓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손에 내 성품이 빚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답을 하나님께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생각과 판단과 고집을 내려놓고 배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많이 아는 사람보다 배우려는 사람이 복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어도 “주님, 저는 아직 모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어도 “주님, 저를 다시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은혜를 경험했어도 “주님, 제가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음성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해주세요.
    제 생각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우게 하시고,
    제 경험보다 주님을 더 의지하게 하시며,
    제 성품이 주님의 손에 빚어지게 해주세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계속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번 알고 끝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평생에 걸쳐 그분을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알게 된 하나님이 오늘의 전부가 아니며, 어제 경험한 은혜가 오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오히려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알수록 더 배우고,

    많이 경험할수록 더 낮아지고,

    오래 믿을수록 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먼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제가 주님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해주세요.
    오늘도 주님을 새롭게 알아가게 해주세요.”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앞에 나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려는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배우려는 사람에게 열리는 삶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귀만 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고, 우리의 성품을 빚어 가십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길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기꺼이 배우려 하는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배움의 자리에서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변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믿음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믿음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좋은 사람을 생각하면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전도하고,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도 믿음의 아름다운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조금씩 해 가면서 한 가지를 더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적극성은 반드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말씀을 붙들며, 잘못된 생각과 싸우는 것이 더 치열한 믿음의 모습일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조용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보다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까지 모두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는지,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올라왔는지,

    부정적인 생각과 함께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다른 사람이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내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주님을 의식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며,

    내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믿음의 가장 치열한 싸움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부정적인 생각이 마음속으로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안 될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힘들면 어떡하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한 번 시작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특히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있을 때는 생각이 더 커지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신 싸워 줄 수도 없습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생각과 씨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내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생각을 그대로 붙들고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것인지​입니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 기도하고,

    절망적인 생각이 들 때 말씀을 붙들고,

    마음이 자꾸 어두운 곳으로 향할 때 다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 싸우는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입니다.


    생각을 다스리는 것도 믿음의 훈련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떠올리는 것 자체를 항상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계속 붙들고 있을 것인지, 하나님께 가져갈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두려운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두려움만 계속 바라볼 수도 있고,

    “주님, 제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 마음을 붙들어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한 일이 떠올랐을 때 계속 상대방을 원망할 수도 있고,

    “주님, 제 마음에 있는 이 감정을 주님께 맡깁니다.”

    라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미래가 불안할 때 최악의 상황을 계속 상상할 수도 있지만,

    “오늘 하루를 주님과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다시 현재의 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작은 선택들이 쌓여 우리의 믿음을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단지 교회 안에서 무엇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결정할 때 마음이 쫓기고 불안한 가운데서 하면 안 됩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73185

    때로는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행동이 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더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화가 나지만 즉시 말하지 않는 것,

    상처를 받았지만 그대로 되갚지 않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끝까지 내 주장을 밀어붙이지 않는 것,

    조급하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

    겉으로 보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선택이 있습니다.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내가 원하는 결과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멈추는 것도 적극적인 믿음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은 결코 수동적인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무엇이라도 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다리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기도하면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성실하게 하되,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결과를 억지로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내가 앞당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 내 마음을 붙들고 있는 적극적인 시간입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려놓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려놓는다고 해서

    “이제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한 내려놓음은 내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결과까지 내가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것은 기도하고,

    행동할 것은 행동하고,

    순종할 것은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적극성과 내려놓음의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작은 선택이 믿음을 만들어 갑니다

    신앙은 특별한 순간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작은 선택을 통해 조금씩 만들어집니다.

    화가 났을 때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을 때 말씀을 떠올리는 것,

    기도하기 싫은 날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누군가를 판단하고 싶을 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정직을 선택하는 것.

    이런 모습은 사람들에게 크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선택을 보고 계십니다.

    사람의 눈에는 사소한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적극성은 ‘얼마나 많이 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할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믿음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잠시 멈추는 것이 믿음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말하는 것이 순종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침묵하는 것이 순종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순간 누구를 바라보고 있었느냐​일 것입니다.

    내 감정만 바라보고 있었는지,

    사람의 반응만 바라보고 있었는지,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점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곳에서만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찾아올 때 다시 말씀을 붙들고,

    두려움이 밀려올 때 기도하며,

    화가 날 때 내 감정을 다스리고,

    조급할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결코 안일한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행동보다 더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싸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내가 오늘 어떤 생각과 싸웠는지,

    어떤 감정을 내려놓았는지,

    어떤 유혹을 이겨 냈는지,

    어떤 순간에 다시 주님을 바라보았는지를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린 기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택한 순종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린 눈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며 지켜 낸 마음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저는 그런 믿음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더 많이 움직이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바르게 살아가려는 믿음.

    내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내 마음을 다스리는 믿음.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와도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오고,

    다시 기도로 돌아오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적극적인 믿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사람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조금씩 변화되고,

    내 생각이 말씀 앞에서 다듬어지고,

    내 감정이 하나님께 맡겨지고,

    내 뜻이 조금씩 내려놓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주님을 믿으며,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며,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훈련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훈련

    사실 저는 원래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해야 할 말이 있을 때는 분명하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말을 못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때로는 당돌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할 말을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남편 앞에서는 달랐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제게 비춰주신 말씀을
    남편에게 전해야 할 때면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남편에게 이야기하려고 하면
    불안과 염려가 먼저 생겼습니다.

    ‘이 말을 하면 남편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또 반발하면 어떻게 하지?’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다투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앞섰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상대도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듣는 사람도 ‘아멘’ 하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전한 말 앞에서
    남편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하게 반발할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전하고 싶은 것은
    제 생각이나 제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것이었고,
    저는 그것을 남편에게 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할 때마다
    갈등이 생겼습니다.

    말씀을 전했는데 평안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딪힘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네 고집으로 순순히 남편을 따르겠느냐?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9710


    ‘주님, 정말 제가 말해야 하는 것이 맞나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맞다면
    왜 이렇게 강하게 반발하는 건가요?’

    ‘제가 잘못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렇게까지 갈등이 생기는데
    그래도 제가 계속 이야기해야 하나요?’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떻게 얘기해야 돼요?”

    “언제 얘기해야 돼요?”

    “제가 어떻게 말해야 남편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비추신 말씀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저절로 아멘 하며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비추신 말씀이라는 사실과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생각이 있고,
    자기 기준이 있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생각과 부딪힐 때는
    강한 반발이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몸으로 배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마음대로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남편이 하나님의 기준에 서도록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그 말씀을 남편에게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참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주님께 불순종하는 것 같았고,

    말씀을 전하면
    남편과 부딪혔습니다.

    전해야 하는데 두려웠고,
    말해야 하는데 망설여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제가 전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제가 배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생각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그 말씀 때문에
    상대의 강한 반발을 감당해야 했고,

    때로는 내가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으며,

    때로는 관계 속에서
    갈등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제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이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서기를 원하셨고,

    그 과정에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들이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사람이 저절로 변화되는 것도 아니었고,
    저절로 아멘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말씀은
    사람의 생각과 기준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저 역시 훈련받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전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빌려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상대가 아멘 하기를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대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충실하게 전하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 질문들을 지나면서
    저는 조금씩 달라져 갔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사람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요.

    저에게 맡겨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주님, 제가 해야 할 말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전해야 합니까?”

    “지금 말해야 합니까?”

    “제가 무엇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게 해 주세요.”

    그렇게 저는
    남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
    순종이 무엇인지를 배워갔습니다.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갈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갈등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기도 속에서 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법을
    하나씩 가르쳐 가고 계셨습니다.

  •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시작된 우리 가족의 갈등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시작된 우리 가족의 갈등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족의 갈등 상황이 시작됐습니다.

    결혼하고 8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친정 부모님과 생활을 합쳐야만 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부모님과 생활을 합치는 것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아이들의 교육과 우리 가정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결혼할 때부터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사랑하며,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가정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어릴때 부터 기도해 왔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큰 갈등 없는 환경에서 가정을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당시 하나님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습니다.

    부모님 두 분 사이에는 갈등이 참 많았습니다.
    서로 골이 깊은 갈등을 극복해 나가기 보다 상대방을 탓하고 비난하는 모습으로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부모님의 관계가 참 많이 싫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모습을 보아 왔던 저에게 부모님의 생활은 그리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부모님의 생활 방식에 특별한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함께 생활한다면,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과 생활을 합치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남편은 맏사위로서 부모님을 외면할 수 없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모두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 남편의 뜻에 따라 저희는 부모님과 생활을 합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저는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왜 꼭 함께 살아야 할까?’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환경이 되면 어떻게 하지?’

    여러 가지 생각이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상황을 조금씩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부모님의 형편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아버지는 페인트 기술을 가지고 계셨으나 소득이 일정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어머니 역시 생활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가 어려우셨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생활은 두 분에게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1998년,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암 중기 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미 경제적으로 힘겨운 상황에서 어머니의 병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라는 큰 경제적 어려움까지 닥쳤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은 부모님에게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에게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 익숙하게 살아오던 공간을 떠나, 술을 마시지 않는 점잖은 사위가 있는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신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정말,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59세였습니다.

    오랫동안 자신만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의 공간과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점점 더 술에 의존하셨습니다.

    술을 드시는 빈도도 날마다 높아졌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참 힘들었고, 가족 간에도 갈등이 생겼지만, 누구 하나 갈등을 표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선택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아버지를 판단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저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술을 찾으시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암 진단.

    경제적인 어려움.

    IMF로 인한 사회 전체의 불안.

    자신이 평생 살아온 공간을 떠나야 했던 상황.

    그리고 사위와 함께 살아가면서 느꼈을 여러 가지 불편함과 자존심의 상처까지.

    어쩌면 아버지는 그런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술로 잠시 잊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을 의지하는가? 술을 의지하셨던 친정아버지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08142



    물론 술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것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그렇게밖에 자신의 힘겨움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 시간이 앞으로 제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말입니다.

    당시에는 그저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염려했고, 우리 가정의 평안이 깨질까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인생에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우리 가정에 생겼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단순히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많은 상황 속에서 흔들릴 수 있는지 보게 되었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아픔을 감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그 시간을 지나면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술을 드시는 아버지의 모습만 보면 답답하고 속상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아버지의 삶을 조금씩 생각해 보게 되면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아버지만의 무거운 인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제가 여러 가지 삶의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그때의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인생은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통해서도 나를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훗날 제가 부모님을 바라보는 마음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환경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가족의 연약함을 함께 바라보고, 힘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도 삶의 중요한 교육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언제나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갈등도 있었고, 마음이 힘든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생각과 계획대로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길이라도 그 길을 지나면서 배우게 되는 것이 있고,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 훗날 돌아보면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때를 생각할 때 단순히

    ‘나는 부모님과 살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 살게 되었다.’

    라고만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는 부모님의 아픔이 있었고, 우리 가정의 고민이 있었으며,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내가 원하지 않았던 그 시간에도 나와 함께 걷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저는 가족을 바라보는 마음을 조금씩 배워 갔습니다.

    그때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편이 아립니다.

    술에 기대어 힘겨운 시간을 견디셨던 아버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던 딸.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함께 지나야 했던 우리 가족.

    지나고 보니 그 시간도 제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시간이 아니라, 오래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 아픔도 있었지만, 그 아픔을 통해 배운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가장 힘겨운 순간에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연약함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조금씩 다듬어 가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 네 고집으로 순순히 남편을 따르겠느냐?

    네 고집으로 순순히 남편을 따르겠느냐?

    남편과의 갈등이 심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주님 앞에 주저앉았습니다.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속상해서 한참을 울다가, 그때도 주님께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제발 남편에게 직접 말씀해 주세요.”

    “제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으니, 주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세요.”

    “남편이 주님의 뜻을 알게 해 주세요.”

    저는 어떻게 해야 남편이 변할까? 라는 생각과 함께 넋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직접 말씀해 주셔서 남편이 깨닫고 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 속에 있는 이야기를 주님께 다 쏟아 놓았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도 없었습니다.

    그저 힘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 마음이 조금씩 잠잠해졌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정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72414



    주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남편에게 직접 얘기해 주고, 너에게는 일러 주지 않았을 때 네 고집으로 남편의 얘기에 순순히 순종하겠느냐?”

    순간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었는데, 울던 마음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아… 그러네.’

    사실 저는, 남편이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바뀌었으면 하는 바램에는

    제가 편안하게 따라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제 중심을 아셨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제게 아주 간단한 질문 하나를 던지셨습니다.

    “그런데 네가 정말 남편의 말에 순순히 따르겠느냐?”

    그 질문 앞에서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남편이 무엇을 말 하느냐 보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저는 남편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먼저 제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마음을 주셨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돕는 자다.”

    그 말씀이 제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아내의 역할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돕는다 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무조건 순종하고 또 무조건 도와야 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수없이
    몰려들었습니다.

    남편이 잘 몰라서 헤매고 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옆에서 기도하고, 필요한 말을 지혜롭게 전하면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제가 알고 있었던 아내의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순간 제 마음속에는 아주 솔직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남편이 좀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말 그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 하필이면 왜 이렇게 어려운 사람을 만나게 하셨을까요?’
    그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네가 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가 변화하기를 기다리기보다, 네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먼저 돌아보아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것.

    중보하는 것.

    사랑으로 돕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안에 있는 고집과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내려놓는 것.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기를 원하셨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돌이켜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네 고집으로 순순히 남편을 따르겠느냐?”

    그 한마디에 저는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가장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을 먼저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마음부터 만지기도 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저는 그 질문을 기억합니다.

    “네 고집으로 순순히 남편을 따르겠느냐?”

    생각할수록 웃음이 납니다.

    그러면서도 그 질문 앞에서는 여전히 제 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남편을 위해 기도하며 돕는 아내가 되기를 원하셨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갈등 때문에 주님 앞에 주저앉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제 고집을 내려놓게 하시고, 아내로서의 자리를 다시 가르쳐 주신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중보 기도로 배우자를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안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 이라고요.

    지금 남편이 변화되고 있는 모습에
    실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제 생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은 오늘도 제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오늘도 새롭게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 무엇을 의지하는가? 술을 의지하셨던 친정아버지

    무엇을 의지하는가? 술을 의지하셨던 친정아버지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기도 하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술을 의지하셨던 아버지

    친정아버지는 평소에도 술을 많이 드셨습니다.

    그런데 저희와 함께 생활하게 된 후에는 술을 더 많이, 더 자주 드셨습니다.

    술을 드시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실 때가 많았고, 아파트 단지 안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계신 날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목청은 또 얼마나 좋으셨는지 모릅니다.

    술을 드시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시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시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족의 마음은 참 힘들었습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고, 가족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자연스럽게 소문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희에게 사람들의 시선이나 소문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술을 드시지 않고 살아가실 수 있을까?”

    그리고 마음속으로 늘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실 수 있을까?”


    다섯 살 아이가 할아버지를 찾아다녔습니다

    당시 저희 둘째 아이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으면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고 밖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할아버지를 찾으러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을 돌아다니다가 할아버지가 어디엔가 쓰러져 계신 것을 발견하면 곧바로 집으로 달려와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엄마, 할아버지 쓰러져 있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다섯 살 어린아이가 할아버지가 어디에 쓰러져 있는지 찾아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저희가 집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생기면 구급 안내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고 그렇게 할아버지를 찾아다녔을까 싶습니다.

    그저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으면 걱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아버지에게 알코올성 치매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때는 치매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왜 같은 말씀을 계속 반복하시는지,
    왜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술을 많이 드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니까 기억력이 떨어지고, 술 때문에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아버지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시 가족들이 겪었던 힘든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를 돌보는 일은 여전히 힘들었고, 가족 모두가 지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달라질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가 힘들어하셨던 부분

    당시 제 남편은 신학을 하겠다고 하면서 직장을 다니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린 손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가고 있었고,
    아이들을 교육하려면 앞으로 들어갈 돈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장으로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아버지의 눈에는 그것이 참 답답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신학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께서 그 길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알지 못하셨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믿음이 없으셨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현실이 더 크게 보였을 것입니다.

    어린 손자들은 커 가는데
    사위는 직장을 다니지 않고 신학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는가?”

    하는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자식들이 어려울 때 아버지로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으셨을 텐데,
    정작 아버지 자신도 자식들을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참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자식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도와줄 수 없는 마음.

    어린 손자들이 커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앞으로의 삶이 걱정되는 마음.

    그런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큰 답답함으로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까지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하나님께서 남편을 부르셨다고 믿고 있었기에
    아버지가 왜 그렇게 답답해하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니
    아버지의 입장도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에게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더 크게 보였을 것입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 길이 자신이 생각하는 안정된 길과 다르니
    걱정되고 답답하셨던 것이겠지요.

    어쩌면 그 답답함과 무력감도
    아버지가 술을 더 찾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술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답답해하셨던 것도
    어쩌면 자식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모습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술 뒤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걱정과 답답함,
    그리고 자식들을 향한 마음까지 조금씩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마음들이 하나씩 보이기도 합니다.




    *순종이 가장 어려웠던 자리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08477


    무엇을 의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느냐는 참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술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고,
    술 한 잔으로 힘든 일을 잊고,
    술 한 잔으로 외로움을 견디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의 삶을 끌고 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문득 나 자신에게도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 잠언 3장 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과 경험 그리고
    사람이나 환경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서 삶의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문제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술을 끊기를 원했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은 많이 힘들었습니다.

    답답할 때도 있었고, 화가 날 때도 있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오면서 저는 오히려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무엇인가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만 무엇인가를 의지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가 의지했던 것과는 방향이 달랐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깨닫습니다.

    무엇을 의지하느냐는 결국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술을 의지하셨고, 그 술에 삶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왜 그렇게 술을 의지하셨는지,
    왜 술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는지
    지금도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단순히 술을 많이 드셨던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안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아픔이 있었을 수도 있고,
    질병이 있었을 수도 있고,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가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삶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것도 배웁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힘들 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할 때 붙잡는 것은 무엇인가?

    삶이 흔들릴 때 나는 누구를 바라보는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 예레미야 17장 7절

    삶에는 사람들이 의지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도, 돈도, 능력도, 환경도 자신을 끝까지 붙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삶이 어떤 것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버지의 삶을 바라보며 시작했던 질문,

    “사람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

    이 질문은 이제 다른 사람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내 결심만으로는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내 결심만으로는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 많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에게는 책임감 있는 딸이고 싶었습니다.

    남편에게는 지혜로운 아내이고 싶었고,
    자녀들에게는 좋은 엄마이고 싶었습니다.

    형제들에게는 어려울 때 도움을 줄 줄 아는 언니이고 싶었고,
    동기간에는 갈등보다 화평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살아오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마음속에 꽤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어릴 때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의 나는 정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따라 내 삶을 돌아보다 보니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부모님에게는 책임감 있는 딸이고 싶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친할머니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할머니는 내게 참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마음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말이 있습니다.

    “아빠 엄마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네가 아들 역할을 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말이 좋지 않았습니다.

    책임감이 싫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부담스러웠고,
    무언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 말을 한두 번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싫은 마음으로 들었던 그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서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원해서 마음에 품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반복해서 들었던 말이
    어느새 내 생각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이 언제부터 내 안에 자리 잡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보니
    가족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모님이 힘드시면 내가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다시 나에게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어릴 때는 그렇게 싫었던 책임감인데,
    어른이 된 나는 오히려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는
    책임감 있는 딸이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이 힘드실 때 외면하지 않고 싶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이 연약해지셨을 때는
    내가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분 모두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와서 돌아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부모님에게 어떤 딸이었을까?’

    더 잘해드릴 걸.

    조금 더 이해해 드릴 걸.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해드릴 걸.

    그때는 왜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까.

    이제는 아무리 잘해드리고 싶어도
    다시 해드릴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생각하면
    아쉬움도 남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부모님을 위해 애쓰며 살아왔던 나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하게 됩니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했기 때문에
    잘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니
    그 사랑 안에는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은 책임감도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니까 내가 해야 하고,
    가족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조금 더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에게는 지혜로운 아내이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에게만 그런 마음을 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남편에게도 좋은 아내이고 싶었습니다.

    내 생각만 주장하기보다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고,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지혜롭게 대처하는 아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남편이 힘들 때 위로가 되어 주고,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면서 함께 걸어가는 아내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아내가 되는 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요.

    내 마음이 상하면 지혜보다 감정이 먼저 나왔고,
    내 생각이 옳다고 여겨질 때는 상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좋은 아내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 마음만으로 언제나 좋은 아내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에게는 좋은 엄마이고 싶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좋은 엄마이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힘들 때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는 엄마,
    실수했을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엄마,
    아이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엄마이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훗날 어린 시절을 돌아보았을 때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했어.’

    그렇게 기억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나 역시 완벽한 엄마는 아니었습니다.

    지쳐 있을 때는 아이의 작은 행동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내가 힘든 상황에서는 아이의 마음까지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아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좋은 엄마로 살아내지 못했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사랑했던 마음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습니다.


    형제들에게는 도움을 줄 줄 아는 언니이고 싶었습니다

    형제들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외면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언니이고 싶었습니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나 역시 힘든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 역시 모든 것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때로는 나 자신 하나를 돌보는 것조차 버거운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동기간에는 화평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동기간에
    화평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겼을 때
    누군가의 편에 서기보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불씨를 더 크게 만들기보다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말해도
    내 뜻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내가 화평을 만들려고 했던 일이
    오히려 또 다른 갈등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을 내가 화해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먼저 상처 주는 말을 내려놓고,
    상대를 존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진실하게 대하는 것까지일 수 있습니다.

    그 이후의 일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마음의 방향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52918


    돌아보니 나는 내가 생각했던 사람과 많이 달랐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돌아보니
    내가 생각했던 나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온 나의 모습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나는 좋은 딸이고 싶었습니다.

    좋은 아내이고 싶었습니다.

    좋은 엄마이고 싶었습니다.

    도움을 줄 줄 아는 언니이고 싶었습니다.

    화평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제의 나는
    때로는 화를 냈고,
    상처를 주었고,
    참지 못했고,
    내 생각을 앞세웠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돌아보면
    예전 같았으면 나 자신에게 실망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이렇게 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왜 또 이렇게 되었을까?’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결심만으로는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더 잘해야지.

    조금 더 참아야지.

    조금 더 이해해야지.

    사랑해야지.

    화평을 만들어야지.

    그렇게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보니
    결심한다고 해서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도
    내 안에는 여전히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내 마음이 상하면 사랑하기 어려웠고,

    참고 싶어도
    어느 순간 감정이 먼저 튀어나왔습니다.

    용서하고 싶어도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고,

    화평을 만들고 싶어도
    내 안의 상처 때문에 오히려 갈등을 키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예전에는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것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결심만으로 변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나를 하나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이제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내 힘으로 만들어 가려고 애쓰기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결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님, 저는 제 결심만으로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내가 참아야 할 때 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내가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몫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기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먼저 묻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넘어졌을 때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라고 나를 책망하기보다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여전히 이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여전히 이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부모님에게는 책임감 있는 딸이고 싶었습니다.

    남편에게는 지혜로운 아내이고 싶습니다.

    자녀들에게는 좋은 엄마이고 싶습니다.

    형제들에게는 어려울 때 손을 내밀 수 있는 언니이고 싶습니다.

    동기간에는 갈등보다 화평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릴 때 할머니가 내게 하셨던

    “네가 아들 역할을 해야 한다.”

    는 말은 오랜 시간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말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어린 나에게는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들었던 그 말은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내 생각과 삶의 태도 속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그 흔적을 조금씩 바라봅니다.

    나는 오랫동안
    사랑과 책임을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니까 내가 해야 하고,
    사랑하니까 내가 참아야 하고,
    사랑하니까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돕고,
    내가 해야 할 몫을 다한 뒤에는
    나머지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는 것을.

    부모님은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부모님을 사랑하며 살아왔던 시간과
    그 안에서 배운 것들은 여전히 내 삶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조금씩 흘려보내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다만 예전처럼
    모든 것을 내 책임으로 짊어지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나의 결심보다
    나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지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내 삶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내가 원했던 모습으로 완벽하게 살아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는 고백하고 싶습니다.

    “나는 부족했습니다.
    내 결심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조금씩 나를 빚어 가셨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다만 이제는
    내 힘으로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도록
    나 자신을 맡겨드리고 싶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막연하게 대답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훌륭한 성인이나 사랑을 가르치신 위대한 스승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구원자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아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믿느냐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식과 구원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마태복음 3:17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러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잘 섬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태복음 16:16

    여기서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곧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우연히 등장한 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매우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요한복음 1:1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14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요한복음 14:9

    예수님의 삶과 말씀과 행동을 바라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로마서 3:23

    죄는 단순히 우리가 저지른 몇 가지 잘못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누가복음 19:10

    예수님은 길을 잃은 사람을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이사야 53:5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한 희생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요한복음 1:29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포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 마태복음 28:6

    부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요한복음 11:25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선행이나 노력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4:6

    예수님은 여러 가지 구원의 방법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사도행전 4:12

    구원의 중심에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중보자이십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디모데전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디모데전서 2:5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시는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현재의 삶이 조금 더 평안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면 이제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내 감정과 판단을 따라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17

    예수님은 우리의 겉모습만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회개와 순종과 변화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와 부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요한복음 14:3

    예수님은 다시 오실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단지 과거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계시며 우리와 함께하시고, 장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단순히 알고 있는 데서 그치지 말고 믿고 영접하라고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요한복음 1:12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고 싶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요한복음 14:15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쉽게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만 예수님을 생각할 수도 있고, 힘들 때 도움을 주시는 분 정도로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크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구주이십니다.

    또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살아 계시고, 장차 다시 오실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이유도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해서이고, 기도하는 이유도 주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이유도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와 가치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으로 무엇이 옳은지 말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든 소리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히브리서 12:2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길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때 믿음은 결국 선택의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도 조금씩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종교생활을 위한 분이 아닙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며, 죄에서 건지시는 구원자이시고,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길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한복음 10:11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에 가기 위한 수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예수님을 정말 누구라고 믿고 있는가?”

    예수님을 단지 성경 속의 인물로 알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태복음 16:16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