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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 바울,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다.

    사도 바울,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다.

    사도 바울,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성경에서 사도 바울만큼 극적인 인생의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도 많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가장 강하게 박해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을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사용하셨을까요?

    바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히 한 사람의 회심 이야기를 넘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1.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도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그는 훗날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열심이었습니다.

    그 열심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순종하는 열심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한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박해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길에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

    하늘에서 강한 빛이 비추고,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묻습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졌습니다.

    자신의 열심이 무너졌습니다.

    자신의 판단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울은 처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1863

    *복음이란 무엇인가 — 성령의 비추심으로 복음을 깨닫다

    3. 다메섹의 사건은 바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사람을 판단했고, 자신의 지식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의 눈이 닫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묵상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내가 알고 있는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을까요?

    내 경험과 판단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고 있지는 않을까요?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게 하시면서 새로운 것을 보게 하십니다.

    바울에게 다메섹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뜻으로 살아가던 삶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삶으로 바뀐 장소였습니다.


    4.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바울의 회심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훗날 자신을 가리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

    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에는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것은…”

    바울은 자신의 죄를 보았지만 자신의 죄 때문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과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했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박해자를 복음의 일꾼으로 바꾸셨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 쓰임받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사람은 과거를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이루실 일을 보십니다.

    물론 이것은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도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과거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크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기준은 그 사람의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에 있습니다.


    6.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고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삶을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삶이 편안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매를 맞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돌에 맞았습니다.

    배가 파선되기도 했습니다.

    굶주림과 위험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은 자신의 삶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약속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것이 바울의 순종이었습니다.


    7. 사도 바울의 중심에는 언제나 복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평생 붙들었던 것은 지식이나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에서 복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하나의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꾼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8.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지만 자신을 완벽한 사람으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이야기합니다.

    그에게는 이른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매우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강함만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 가운데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난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꾸어 줍니다.

    고난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응답이 늦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신 것도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문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9. 사도 바울은 끝까지 달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성공과 실패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는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는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하나였습니다.

    믿음을 지켰는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끝까지 걸었는가?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10. 사도 바울의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

    바울의 삶을 묵상하다 보면 결국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혹시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길을 하나님께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죄를 얼마나 깊이 보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받은 은혜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끝까지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바울은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무리 —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삶

    사도 바울의 삶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박해자가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던 사람이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를 자랑하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만 보고 계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며 무엇을 깨닫게 하시고 어떤 사람으로 변화시키실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계속 자신을 돌아보고, 깨닫게 하실 때 돌이키며, 부르실 때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다 달린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우리도 언젠가 삶의 마지막에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때로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났습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걸으라 하신 길을 끝까지 걸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사도 바울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모습일 것입니다.

  • 복음이란 무엇인가 — 성령의 비추심으로 복음을 깨닫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 성령의 비추심으로 복음을 깨닫다

    우리는 흔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이런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나는 복음을 정말 알고 있는가?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내가 복음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제부터 복음을 전할 사람의 눈으로 성경을 천천히 배워보려고 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말씀으로 고린도전서 15장 1-4절을 묵상해 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다시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말 그대로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좋은 이야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분명하게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
    장사되셨다는 것,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셔야 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내 죄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으로
    “나는 죄인이다”라고 아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아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내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때로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였음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했던 마음,
    내 욕심과 교만,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뜻을 붙들고 있었던 모습까지

    말씀 앞에서 하나씩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자기반성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때 일어나는 깨달음입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95329


    *죄란 무엇인가 — 나는 왜 내 죄를 스스로 보지 못하는가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8).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그리고 그 빛 앞에서 우리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던 마음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도 깊이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깨달을 때 다르게 보입니다

    내가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할 때에는
    십자가를 단순히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동시에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거룩하심도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십자가는 더 이상 멀리 있는 성경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바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구나.”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복음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복음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장사되셨지만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만 있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희생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는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지식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복음을 깊이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지식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며,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게 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복음을 잘 설명한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 먼저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말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에게 복음인지

    성경 안에서 차근차근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복음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돌아보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나를 비추실 때,

    내가 보지 못했던 죄를 보게 하시고
    내가 의지하던 것들을 내려놓게 하시며
    내가 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배우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할 내용을 준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먼저 내가 복음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도 복음 앞에 섭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한 걸음 더 질문하고 싶습니다.

    나는 왜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인가?

    그 질문 앞에서 성령께서 내 마음을 비추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죄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분명히 바라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내가 복음 앞에 서겠습니다.

    그리고 성경 안에서
    복음이란 무엇인지, 왜 복음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 복음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씩 배워가겠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첫 번째 걸음입니다.

  • 죄란 무엇인가? 죄의 본질— 나는 왜 내 죄를 스스로 보지 못하는가

    죄란 무엇인가? 죄의 본질— 나는 왜 내 죄를 스스로 보지 못하는가

    죄의 본질? 우리는 흔히 죄를 생각할 때 먼저 행동을 떠올립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 남을 미워하는 것, 욕심을 부리는 것,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잘못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들도 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뜻보다 내 생각과 욕망을 앞세우는 것,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로마서 3:23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보다 정직하게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법을 잘 지키고 선한 일을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거의 주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죄가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나는 나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 살아왔고, 하나님의 뜻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며 살아왔다.”

    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왜 나는 내 죄를 스스로 보지 못할까요?

    바로 죄의 본질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죄가 그렇게 심각하다면 우리는 왜 자신의 죄를 잘 보지 못할까요?

    성경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 매우 엄중하게 말씀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 예레미야 17:9

    사람은 자신의 죄를 바라볼 때조차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화를 냈다면

    “그 사람이 먼저 나를 화나게 했어.”

    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은 미움받을 만한 사람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부렸다면

    “나도 이 정도는 가져야 하지.”

    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도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은 쉽게 보면서도 자신의 마음속 죄는 합리화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죄의 무서운 점은 단순히 죄를 짓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9941


    *복음이란 무엇인가 — 성령의 비추심으로 복음을 깨닫다

    3. 죄는 행동보다 먼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죄의 본질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단순한 행동의 문제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이 살인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음욕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탐심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교만 역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 이전에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행동만 고치려고 하면 죄의 뿌리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달라졌는데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주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죄는 행동의 문제이기 전에 죄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문제입니다.


    4.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완전히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요한복음 16:8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죄에 관한 지식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때 비로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했던 것이 사실은 교만이었구나.”

    “내가 화를 낸 이유가 단순히 상대방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 뜻대로 살고 싶어 했구나.”

    “나는 하나님보다 돈과 사람과 내 안전을 더 의지하고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죄에 대한 지식과 죄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의 차이입니다.


    5. 성령의 비추심은 우리를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을 이해하고 죄를 깨닫게 되면 처음에는 마음이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훨씬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죄를 드러내시는 목적은 우리를 정죄하여 절망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죄를 보게 하심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지 절실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고백이 달라집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힘으로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고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6. 죄를 깨닫는 사람에게 십자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을까요?

    인간의 죄가 그렇게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십자가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음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이며 내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깊이 깨닫는 것은 복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자리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7. 진정한 회개는 죄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깊은 회개는 행동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행동 뒤에 있는 내 마음을 바라보게 합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

    무엇을 원했는가?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무엇을 의지했는가?

    하나님보다 무엇을 더 사랑했는가?

    이 질문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죄의 뿌리를 조금씩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8.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절망의 고백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요한일서 1장 8-9절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지만,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죄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는 사람은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게 됩니다.


    9. 오늘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의 문제도 보입니다.

    세상의 타락도 보입니다.

    교회의 문제도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위선도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비추신다면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내 안에 있는 교만은 무엇일까요?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얼마나 클까요?

    용서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마음은 없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정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 질문 앞에 조용히 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무리 — 죄를 보는 눈이 열릴 때 복음이 보입니다

    죄의 본질을 이해 하고 죄를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는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안에서 발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때 우리는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훨씬 심각한 죄인이었구나.”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구나.”

    죄를 깨닫는 것은 복음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깊이 깨달을수록 십자가의 은혜가 더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다른 사람의 죄를 보기 전에 먼저 제 죄를 보게 해 주세요.

    제가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속이지 않게 해 주세요.

    성령께서 제 마음을 비추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저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죄를 보았을 때 숨거나 변명하지 않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세요.”

    죄를 보는 눈이 열릴 때, 복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복음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지를 알게 되며

    죄의 본질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생명이 없음을 고백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죄의 본질을 깨닫고 바라 볼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축복입니다.

  • 욥,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욥,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욥의 고난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납니다.

    분명히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려움이 찾아오고,
    기도했는데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려고 애쓰는데 오히려 삶이 더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성경의 욥은 바로 그 질문 앞에 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욥기는 단순히 고난을 잘 견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사람, 욥

    욥기 1장은 욥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었던 이유가 단순히 자신의 삶이 평안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은 욥의 삶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먼저 보여줍니다.

    욥은 고난이 시작되기 전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자신의 몸마저 심각한 고통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한순간에 평안했던 삶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욥이 처음 보인 반응은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물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짜 믿음의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욥은 왜 고난을 당했을까?

    우리는 욥기의 처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욥에게 일어난 일의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 자신은 몰랐습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버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욥기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전체적인 이유를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서 쉽게 판단합니다.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일 거야.”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일 거야.”

    욥의 친구들이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계속해서 그의 고난에는 반드시 죄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욥의 친구들에게 그들의 말이 옳지 않았음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모든 고난을 죄의 결과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보다 더 힘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욥에게 가장 힘든 것은 단순히 재산을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녀를 잃은 슬픔도, 몸의 고통도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고통은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지 모르겠다”

    는 것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때로는 너무나 거칠고 절박한 말까지 쏟아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욥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울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답답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

    “왜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가​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놓친 것

    욥의 세 친구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변호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하나님에 관한 옳은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의 상황을 자신들이 알고 있는 틀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고, 악한 사람에게는 고난이 온다.”

    그렇다면 욥에게 고난이 왔으니 욥에게 반드시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삶을 바라보시는 방식과 달랐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한 부분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삶 전체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누군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때로는 설명보다 함께 울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충고보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지 내가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민사소송의 길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흔적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2519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모든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욥이 가장 원했던 것은 설명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모든 원인을 설명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욥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욥기의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욥은 상황에 대한 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하나님께 답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기도했는데 응답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제가 이런 길을 지나가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욥기의 가장 깊은 고백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달라졌습니다.

    고난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난이 좋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은 지나고 나서야 그 시간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시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떠나셨던 것이 아니라
    제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욥의 회개는 무엇이었을까?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말을 돌이키고 회개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단순히

    “욥에게 큰 죄가 있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고, 마지막에 그 죄를 회개했다.”

    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욥기는 처음부터 욥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욥의 회개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큰 악을 행했다는 의미라기보다,
    자신이 하나님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데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안에 가두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기도했으니 반드시 이런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내가 옳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욥의 마지막 회복이 보여주는 것

    욥기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욥의 삶을 회복시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잃었던 것들을 다시 얻게 되고, 그의 삶은 다시 회복됩니다.

    하지만 욥기의 결론을 단순히

    “고난을 잘 견디면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신다.”

    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욥기의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욥에게 가장 큰 회복은 재산의 회복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녀와 삶의 회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 이전의 욥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지나온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우리의 삶에도 욥의 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오히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욥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설명보다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상황을 이해하는 믿음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욥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

    욥기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기도의 응답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만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의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그분을 사랑하는가?

    욥기는 이 질문을 우리 앞에 세워 놓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질문에 답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때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자리에서도

    “나는 지금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욥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났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온다면,

    그 시간을 단지 빨리 벗어나야 할 고난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울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입니까?”라고 물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 질문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답을 얻기 전에도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하나님께서 설명해 주시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욥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욥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어쩌면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깊은 만남은
    내가 모든 것을 이해했을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았을 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분별하는가?|성경으로 분별하기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분별하는가?|성경으로 분별하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만납니다.

    “이 길로 가야 할까?”
    “이 사람의 말을 믿어도 될까?”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일까?”
    “내 마음에 강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일까?”

    특히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기도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성경을 읽다가 특정한 말씀이 마음에 강하게 와닿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주변 사람의 말이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나의 생각인지 분별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기준은 내 감정이 아니라 성경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과 정반대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일을 숨기기 위해

    “이번에는 거짓말을 해야 할 것 같아.”
    “하나님께서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실 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성경 말씀과 충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나 음성이 마음에 떠올랐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분별의 기준입니다.


    2. 내 마음에 강하게 느껴진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강한 감정과 확신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상황에 따라 쉽게 흔들립니다.

    두려울 때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욕심이 생기면 내가 원하는 방향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강하게 느끼는가’보다 ‘그 생각이 무엇을 향하게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나의 욕심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 때문에 성급하게 결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사실은 이미 내가 원하는 결론을 정해놓은 것은 아닌가?

    이 질문들이 필요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성경 말씀 앞에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보다 내 생각을 더 신뢰하도록 인도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내 안에 욕심은 없는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없는지,

    교만한 마음은 없는지,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우리를 편안하게 하기보다 먼저 찔리게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살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원하는 것을 확인해 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부분을 깨닫게 하는 빛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려면 먼저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으면서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하면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말씀을 가까이하는 삶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수록 모든 상황에 대한 정답을 자동으로 알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걸러낼 수 있는 기준이 생깁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으로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75948

    5.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내 생각을 관철시키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답을 정해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듣고 싶은 말씀만 듣지 않게 해주세요.”

    “제 욕심과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지 않게 해주세요.”

    “말씀을 통해 제 생각을 비추어 주세요.”

    이러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놓게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답을 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왜 제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만이 아니라,

    “하나님, 제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입니다.


    6.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을 요구합니다

    말씀을 분별하는 목적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에 있지 않습니다.

    알게 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무엇을 하라고 하실까?”

    궁금해하면서도

    지금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지금 정직해야 할 자리에서 정직하지 않고,

    지금 내려놓아야 할 욕심을 붙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직 보여주시지 않은 길보다 이미 말씀하신 것에 대한 순종을 먼저 요구하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먼저 지금 내게 주어진 말씀에 순종 해야 합니다.


    7. 하나님의 말씀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즉시 행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생각을 말씀 앞에 가져가고,

    기도하며,

    시간을 두고 살펴보고,

    내 안의 욕심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필요하다면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잠언 11장 14절은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린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조언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공동체와 믿음의 사람들의 지혜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점검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분별은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8.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둘째, 이것이 나의 욕심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셋째, 두려움이나 감정에 의해 성급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넷째, 이 생각이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다섯째, 내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여섯째, 시간을 두고 기도하며 확인할 필요가 있는가?

    이 질문들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말씀 앞에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한다는 것은 신비한 음성을 많이 듣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감정보다 말씀을 앞세우고,

    내 욕심보다 말씀을 앞세우고,

    내 경험보다 말씀을 앞세우고,

    내가 원하는 결과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믿고 한 걸음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해한 후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말씀하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싶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정하기 전에,

    그 생각을 말씀 앞에 세워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답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내 감정과 욕심을 내려놓고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먼저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다면,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로마서 12:2

  •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으로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으로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기도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이것을 이루어 주세요.”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주님 뜻을 알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때로는 기도를 많이 했는데도 응답을 확인하지 못해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기도가 무엇인지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의 마음과 상황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1.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를 잘 하려면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잘 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에는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쁨도 말할 수 있고,

    슬픔도 말할 수 있고,

    두려움도 말할 수 있고,

    억울함도 말할 수 있고,

    원하는 것도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했고,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럽다고 말했으며,

    억울할 때에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의 뜻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씀은 기도의 중요한 본질을 보여줍니다.

    기도는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구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2. 기도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이렇게 시작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면 기도는 결국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고,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며,

    나의 삶을 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기도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나는 하나님께 나의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3.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은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기도를 경고하시면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말이 아닙니다.

    기도의 길이나 형식도 본질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긴 기도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짧은 기도 하나가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눈물만 흘리며 하나님 앞에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상황을 아뢰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나의 마음을 내려놓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나의 원하는 것을 말하기보다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세요.

    제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4. 왜 기도하고도 응답을 기다리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하지만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이미 답을 정해 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것을 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는 라고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아니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다리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타났는지를 기준으로 응답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이 늦어지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기다림은 믿음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시간을 하나님께 맡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고, 기다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사람, 다윗 | 성경 속 인물 이야기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75948


    5. 하나님의 응답은 반드시 내가 원하는 형태로 오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응답을 너무 좁게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만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상황이 바뀔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을 통해 도움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원했던 문이 닫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상황은 그대로인데 내 마음과 생각이 먼저 바뀌기도 합니다.

    전에는 견딜 수 없었던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전에는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일하시는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는가?”

    만으로 기도의 응답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6. 그렇다면 기도의 응답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내 생각일 수도 있고,

    내 감정일 수도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는 것이 있다면 먼저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죄라고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셨다.”

    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다시 분별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원하는 것이 너무 강하면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답을 찾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7.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도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것만이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면,

    현재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있다면,

    용서하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있다면,

    정직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듯 이미 알고 있는 용서하는 삶과 정직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먼저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음성을 찾으면서

    이미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8. 기도의 목적은 문제 해결만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일까요?

    물론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목적이 문제 해결에만 있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도 함께 흔들릴 수 있습니다.

    기도의 더 깊은 목적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기도하면서 우리의 교만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기도하면서 우리의 욕심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기도하면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변화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9. 기도했는데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때가 오히려 믿음이 필요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의 상황이 똑같을 수 있습니다.

    문제도 그대로이고,

    사람도 그대로이고,

    환경도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있던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원망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게 되고,

    조급했던 사람이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기도의 응답일지도 모릅니다.


    10.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

    기도를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면서 말씀을 살펴야 합니다.

    말씀을 살피면서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이 있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는 한 번의 요청으로 끝나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걷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게 해 주세요.

    제가 원하는 답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기만 기다리지 않게 해 주세요.

    제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해 주세요.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 주세요.

    제가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리게 하시고,

    순종해야 할 때 순종하게 하시고,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게 해 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해 주세요.

    제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해 주세요.”

    기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내딛는 믿음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내딛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때로는 아주 거창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마음에 조용히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지나치지 않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의 마음을 내어놓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한 걸음씩 옮겨가는 것.

    저에게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네 동생 선옥이를 불쌍히 여겨라.”

    몇 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동생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 마음에 아주 부드러운 감동이 찾아왔습니다.

    “네 동생 선옥이를 불쌍히 여겨라.”

    그 말씀은 제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남았습니다.

    동생은 바로 제 아래 동생으로 나이가 있지만, 미혼으로 경제력 없이 건강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 만으로 힘겹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동생은 친정 어머니가 돌아 가시기 전 임대 아파트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저희와 함께 몇 년을 같이 생활하시다가 임대 아파트에 거주하시기 시작하셨는데, 어릴 적부터 할머니가 아픈 모습을 보며 자란 막내 어린 딸이 할머니를 걱정하여 할머니랑 생활했습니다.

    어린 딸의 말이
    “할머니가 많이 아프면, 내가 엄마, 아빠한테 전화 할 수 있잖아!~”
    “그러면, 엄마, 아빠가 빨리 올 수 있고”
    6살 딸의 말이 지금도 생각하면 기특합니다.

    다행히 친정 어머니가 거주 하시고 계신 임대 아파트는 저희가 새로 이사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위에 두 오빠들은 어떻게 어린 동생만 할머니하고 생활하느냐며, 두 아들들도 할머니하고 생활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동생이 늦게 함께 생활하게 되면서 동생으로 인하여 가족 간에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동생으로 인하여 아픈 할머니를 걱정하는 아이들 마음에도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친정 어머니와 나는 동생으로 인하여 가족 간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보고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부모의 가난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보호와 가르침을 받지 못하며 상처투성이인 동생의 아픔을 알기에, 저는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동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라고요.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생은 또 따로 생활하게 되었지요.
    저희는 저희대로 다시 아이들과 함께 생활 할 수 있는 곳으로 이사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속 동생에 대한 부담감을 부어 주셔서 위해서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들려 온 말씀이었습니다.

    “네 동생 선옥이를 불쌍히 여겨라.”

    저도 동생을 불쌍히 여기고 있었기에 계속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주님의 감동의 말씀이 마음에서 울리니,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에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동생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때부터 또 다른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이모를 마음에서 부터 받아 들여져야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렇듯 말씀에 순종 한다는 것은, 저 한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순종은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 순간 모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함께 살 수 있을까?’
    ‘우리 가족이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제가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한 후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마음을 움직이셨고, 남편에게 얘기한 다음
    그 말씀에 순종 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내딛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동생은 저희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직장도 얻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어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안정되었고,
    이제는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신기합니다.

    그때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한 걸음 말씀에 순종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많은 일들은
    제가 계획하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74714


    순종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더 흐른 후
    저는 뜻밖의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내가 동생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동생을 돕고 있었던 것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동생을 통해 나와 우리 가정도 돌보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생을 품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제가 오히려 많은 위로와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무언가를 채워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은혜의 자리로
    내가 말씀에 순종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순종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 말씀의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이 어디로 가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순종하며 떠났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해한 다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며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때
    동생과 함께 살게 될 미래를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가정이 어떻게 달라질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마음에 주신 말씀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순종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조금씩 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항상 큰 결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주 작은 마음의 움직임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용서하라는 마음이 들었을 때
    한 걸음 다가가는 것.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작은 손길을 내미는 것.

    내려놓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내 뜻을 내려놓는 것.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 앞에서
    내 감정보다 말씀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제가 이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순종한다고 해서
    모든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순종의 자리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일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종 후에야 알게 되는 하나님의 뜻

    돌이켜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던 것은
    단순히 동생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제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게 하셨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하셨으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세밀하게 돌보고 계시는지 조금이나마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배웠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순종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 자신을 빚어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의 또 다른 은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런데 때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부터 순종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순종.

    어쩌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큰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이미 들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순종일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그때 모든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마음에 주어진 한 말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한 걸음 뒤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십니다.
    지금 동생은 조금씩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마음에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모든 것을 이해한 후에 순종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이미 알고 있는 말씀 앞에서도
    내 생각과 상황을 이유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결과를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내딛는 믿음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때 배웠습니다.

    순종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이루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에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순종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어 가실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될 때가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씀 앞에서 한 걸음 내딛어 봅니다.

    “주님, 제가 이해하지 못해도
    말씀하신다면 순종하겠습니다.”

    그 한 걸음의 끝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어 가실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함께 묵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세요.

    말씀을 듣고, 분별하고, 순종하는 삶.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 하나님께 묻는 사람, 다윗 | 성경 속 인물 이야기

    하나님께 묻는 사람, 다윗 | 성경 속 인물 이야기

    하나님께 묻는 사람, 다윗

    성경 속 인물 가운데 다윗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어린 목동이었던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 앞에 나아가 싸웠던 이야기,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많은 시편을 남긴 사람.

    우리는 흔히 다윗을 믿음이 강한 사람, 용감한 사람,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에게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각보다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군사들과 함께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곧바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시자 다윗은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자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였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다윗은 경험이 있어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을 경험했고, 사울에게 쫓기는 긴 시간을 보냈으며, 수많은 위기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왕이 된 후에는 더 많은 경험과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의 경험과 판단만으로 결정해도 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5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왔을 때도 다윗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블레셋 사람들이 또 공격해 왔을 때 다윗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 모습이 참 중요합니다.

    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가
    오늘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은혜가 오늘의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어제의 경험이 오늘의 하나님의 뜻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단순한 지식 -믿음에 대한 이해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72029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들은 후 움직였습니다

    다윗에게서 또 하나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께 질문만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묻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함께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놓고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면 내 뜻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의 삶에는 이런 흐름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움직입니다.



    다윗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을 완벽한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에서 큰 죄를 범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행동했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의 삶에는 분명한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다윗을 보여주는 이유는
    “다윗처럼 완벽하게 살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의 삶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보게 됩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물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삶에도 결정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어떤 일을 선택해야 할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때로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의 경험과 감정과 계산을 먼저 앞세웁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맞아.”

    “사람들이 다 이렇게 하니까.”

    “이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니까.”

    그러나 다윗의 삶은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하나님께 먼저 묻고 있는가?”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모든 결정을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내 마음의 욕심을 살피고,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내가 가야 할 길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다윗을 바라보면서 저는 이런 질문을 마음에 담아보고 싶습니다.

    “나는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누구에게 먼저 묻는가?”

    사람에게 먼저 묻습니까?

    내 경험에게 먼저 묻습니까?

    내 감정에게 먼저 묻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먼저 묻습니까?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다윗은 많은 실수를 했고 큰 죄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하나님을 향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따라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저는 이것을 마음에 새겨보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도,

    내 경험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에도,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에도,

    먼저 하나님께 묻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도
    바로 이런 모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 제 생각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게 해주세요.”

    다윗의 이야기는 골리앗을 이긴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진짜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묻고, 듣고, 때로는 넘어지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을 통해 한 사람의 위대한 업적보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믿음의 모습을 배워가고자 합니다.

  • AI가 써준 소송서류, 그대로 제출해도 될까?

    AI가 써준 소송서류, 그대로 제출해도 될까?

    나의 민사소송 경험으로 생각해 본 AI와 법률

    최근 법원에서 생성형 AI를 이용해 작성한 소송서류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AI를 활용해 소장이나 준비서면을 작성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법원에서는 AI가 만들어낸 잘못된 법률 내용이나 존재하지 않는 판례까지 함께 제출되는 사례를 접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당사자가 AI가 작성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법원에 제출하는 경우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제 민사소송이 떠올랐습니다.

    저 역시 소송을 진행하면서 쳇지피티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쳇지피티를 이용해 소송을 준비한 나의 경우도 기사의 사례와 같은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쳇지피티를 이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AI를 어떻게 이용했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AI가 법률 전문가를 대신할 수 있을까?

    생성형 AI는 정말 많은 일을 도와줍니다.

    복잡한 내용을 정리해 주기도 하고, 긴 문서를 요약해 주기도 합니다.

    내가 경험한 일을 시간순으로 정리하거나, 내가 주장하려는 내용에서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쳇지피티에게 법률 문제를 맡긴다고 해서 쳇지피티가 변호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쳇지피티가 만들어 준 문장이 법률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맞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법률 분야에서는 작은 사실관계 하나가 결론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판례를 실제 판례처럼 제시하거나, 실제 판례의 내용을 사건과 맞지 않게 적용한다면 오히려 소송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법원에서는 생성형 AI가 만들어낸 이른바 ‘환각’으로 인해 허위 판례나 잘못된 법률 내용이 소송서류에 포함되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AI가 만들어 준 내용은 완성된 법률 판단이 아니라 검토해야 할 자료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소송은 어떻게 달랐을까?

    저는 증권사와의 민사소송을 직접 진행하면서 쳇지피티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쳇지피티에게

    “내 소송을 대신 해줘.”

    라고 맡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경험한 사건이 있었고,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가 있었습니다.

    2024년 2월 28일에 있었던 자기매도상환부터 다음 날 이루어진 반대매매까지의 과정도 제가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증권사에서는 어떤 설명을 했는지, 금융감독원에 어떤 문의를 했는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있는지도 제가 알고 있었습니다.

    쳇지피티에게 도움을 받은 부분은 그런 사실들을 정리하고, 서로 연결하고, 제가 놓친 부분이 없는지 다시 생각해 보는 과정​이었습니다.


    *민사소송 진행 가운데 가장 크게 얻은 깨달음


    *https://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90381

    쳇지피티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 내가 겪은 사실을 쳇지피티와 함께 정리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사실을 쳇지피티에게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경험한 사실을 먼저 이야기하고,

    “이 부분이 법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가 있을까?”

    “이 논리가 앞뒤가 맞는가?”

    “이 자료에서 중요한 부분은 무엇인가?”

    등을 계속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쳇지피티가 제시한 내용도 그대로 믿지 않고 다시 확인했습니다.

    특히 소송에서는 사실과 법률적 해석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제가 실제로 경험한 사실은 제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고,

    쳇지피티가 제시하는 법률적 설명은 다시 확인해야 할 정보였습니다.


    소송에서 쳇지피티가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대신 써주는 것’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쳇지피티가 가장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문장을 만들어 주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혼자 소송을 준비하다 보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만 집중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AI에게 사건을 설명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있나요?”

    “상대방은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 두 주장은 서로 모순되지 않나요?”

    “이 자료가 정말 그 주장을 증명하나요?”

    이런 질문을 계속 주고받다 보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AI가 작성한 문장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가’

    이번 기사를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남은 부분도 바로 이것입니다.

    소송서류의 문장이 얼마나 전문적으로 보이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을 제출한 당사자가 그 내용을 실제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쳇지피티가 아무리 훌륭한 문장을 만들어 주더라도 내가 그 내용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문장이 조금 서툴더라도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그 사실을 뒷받침할 자료를 제시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결국 법원에 제출하는 서류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쳇지피티가 아니라 소송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AI는 ‘변호사’가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

    저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쳇지피티를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쳇지피티는 변호사가 아니다.

    그리고

    쳇지피티에게 소송을 맡겨서도 안 된다.

    하지만 AI는 혼자 소송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상당히 유용한 생각의 정리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법률용어가 어렵고, 어떤 자료가 중요한지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자체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중요한 법률 판단이나 판례의 정확성은 반드시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쳇지피티가 제시한 판례나 법률 조항을 실제 법령·판례 자료와 대조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나의 소송 경험이 말해주는 것

    저는 변호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 소송을 시작했을 때는 법률용어 하나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은 대형 법률사무소를 선임했고, 저는 혼자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쳇지피티는 제가 사건을 정리하고 생각을 이어가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제가 놓지 않았던 것은 하나였습니다.

    “이 내용이 실제로 내가 겪은 일인가?”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할 자료가 있는가?”

    였습니다.

    쳇지피티가 아무리 좋은 설명을 해주더라도 실제 사건과 맞지 않는다면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쳇지피티가 대신 싸워준 것이 아니라,

    제가 제 사건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I 시대의 소송,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

    이번 기사를 읽으면서 몇 가지 원칙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AI가 만들어 준 내용을 사실로 믿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판례와 법률 조항은 반드시 실제 자료로 확인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제출하는 내용은 내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AI에게 없는 사실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AI는 법률전문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는 보조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과 증거를 중심에 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며

    이번 기사를 읽기 전까지는 쳇지피티를 이용해 소송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을 다시 돌아보니 중요한 것은 쳇지피티를 사용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쳇지피티가 써준 내용을 그대로 믿고 법원에 제출하는 것과,

    내가 직접 겪은 사실과 자료를 바탕으로 쳇지피티의 도움을 받아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확인하고, 내가 이해한 후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AI는 빠르게 글을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진실을 경험한 것은 AI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리고 법원에 제출하는 주장에 대해 책임지는 것도 AI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AI가 법률 영역에서 더 많이 활용되더라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I에게 내 사건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AI의 도움을 받아 내 사건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저에게 이번 민사소송은 단순히 법정에서 승패를 다투는 경험만은 아니었습니다.

    혼자서도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어떤 자료를 확인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주장하는 내용을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워가는 과정이었습니다.

    ※ 이 글은 개인적인 소송 경험과 최근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AI 활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이며, 개별 사건에 대한 법률 자문이나 법률전문가의 의견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 단순한 지식 -믿음에 대한 이해

    단순한 지식 -믿음에 대한 이해

    믿음은 단순한 지식과 분위기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예배를 드리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성경을 많이 읽고 단순한 지식이 많으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정말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믿음이라는 말을 너무 익숙하게 사용하다 보니 오히려 믿음의 본질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믿음은 종교적인 행위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믿음은 어려울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이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깊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의 중요한 기초가 될 수 있지만, 지식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저 사람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정작 어려운 순간에 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의 능력을 알고 있는 것과 그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에도 이와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때때로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하려고 합니다.

    기도하면서도 결과는 내가 정해 놓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하면서도 일이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면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하시는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식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체 되신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 우리가 믿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께 받아내는 힘이 아닙니다.

    믿음은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선하시고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조명 비추심이 있어야 그 삶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은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열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미리 보고 움직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일 때가 많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붙드는 것.

    지금 당장은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

    내가 모든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지혜가 나보다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참 믿음의 모습이며, 단순한 지식으로는 불가능한 삶입니다.

    믿음은 감정과도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좋다는 것을 늘 평안하고 흔들리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걱정이 생길 수도 있고,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에게도 어려움은 찾아옵니다.

    다만 어려움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믿음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진짜 믿음이라면 결국 삶에서 열매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용서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욕심을 내려놓는 방식이 달라지고,
    어려움을 견디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내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게 됩니다.

    예전에는 억울함을 반드시 내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예전에는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했다면, 이제는 결과를 넘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바로 믿음의 열매이며

    단순한 지식에 의한 종교의 행위에서는 절대로 맺을 수 없는 열매들입니다.

    믿음은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조금씩 드러납니다.

    *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6335


    믿음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믿음을 처음 갖게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참 믿음에는 성장의 과정이 있습니다.

    작은 일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또 다른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때로는 넘어지고 흔들리면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알아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깨닫게 됩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구나.”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뒤돌아보니 그 과정 속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쌓인 경험은 또 다른 믿음이 됩니다.

    믿음의 중심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있습니다

    믿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믿음을 너무 쉽게 ‘내가 얼마나 강하게 믿느냐’​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이 나의 확신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누구신지가 더 중요합니다.

    내 믿음이 강해서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흔들리지 않아서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부족할 때에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핵심은 ‘내가 얼마나 잘 믿는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믿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어떤 종교적인 개념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한 걸음 걷고,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붙들고,
    때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의 모습이라기보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오늘 내가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껴져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씩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나는 오늘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 고백이 바로 우리의 삶으로 이어질 때,
    믿음은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