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문득 생각납니다.
특별히 아버지를 떠올릴 만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래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17년이 되었습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그때는 앞으로도 아버지와 함께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아버지는 제 곁을 떠나셨고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딸만 넷이었던 우리 집
우리 집은 딸만 넷이었습니다.
아들이 한 명도 없었던 집에서 아버지는 장녀였던 저에게 유난히 마음속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버지가 말씀하시니 듣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들이 하나씩 다시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시대에는 여자도 장관이 되고 대통령도 된다.”
어린 저에게는 참 먼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여성이 국가의 중요한 자리에 오르는 일이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말 그럴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마거릿 대처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당시 어린 제게 마거릿 대처라는 이름은 그저 외국의 유명한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 정도로만 들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통해 단순히 한 여성 정치인을 소개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앞으로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얻고,
여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하는 세상이 점점 변해갈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딸들에게도 남자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어린 딸에게 미래를 이야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여자니까 여기까지만 할 수 있다.”
그렇게 한계를 정해 주신 것이 아니라,
“너희 시대에는 여자도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 속에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와 믿음이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의 말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실제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가 그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이 정말 현실이 되었구나.’
세상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여성의 사회 진출도 크게 확대되었고,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자리에도 여성들이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일이 실제 현실이 된 것을 보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지켜보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첫 여성 대통령의 등장은 분명 우리 사회에서 의미 있는 변화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희망을 품었습니다.
저 역시 우리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여러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기대했던 모습도 있었고,
실망스러운 모습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면서 생각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성별이나 직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보다 그 자리를 어떻게 감당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높은 위치에 올라갔느냐보다,
그 위치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정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이 원리는 정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도 그렇습니다.
부모라는 직책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배우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도 중요하지만, 부모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자녀들은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말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보다 실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보다 부모가 먼저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큰 가르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자의 직분과 역할은 분명 소중합니다.
그러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그 사람을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남겨준 것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제게 남겨주신 것은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미래를 바라보는 눈을 조금씩 심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너희 시대에는 여자도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된다.”
그 말씀을 들을 당시에는 그저 아버지의 생각이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말씀은 제게
“너도 할 수 있다.”
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세상이 정해 놓은 한계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라는 뜻처럼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능성을 바라보라는 의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어쩌면 딸들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제가 아버지의 나이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그저 부모님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고 부모님이 살아가셨던 시간을 돌아보게 되면 조금씩 다르게 보입니다.
아버지도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기쁜 날도 있었을 것이고,
힘든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말하지 못한 고민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미래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주고 싶었던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는 더 넓은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00942
17년이 지나도 기억나는 말
사람은 떠나도 말은 남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17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어린 시절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직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어떤 순간에는 아주 오래전의 말 한마디가 다시 떠오릅니다.
그때는 아무 의미 없이 들었던 말이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안에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그때 조금 더 물어볼 걸.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오셨는지 조금 더 물어볼 걸.
아버지가 살아오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물어볼 걸.
이제는 물어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통해 아버지를 다시 만납니다.
사람의 자리는 결국 그 사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제게 들려주셨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오늘 다시 생각합니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직책과 명예는 언젠가 내려놓아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모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보다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길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약한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생각나는 오늘
오늘 문득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말씀하시던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여성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있고,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직책이나 성별이나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자리에 있든 그 자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아버지도 그것을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딸들이 단순히 성공하기를 바라셨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17년이 지난 오늘,
문득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린 딸에게 미래를 이야기해 주셨던 것,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셨던 것,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알려주셨던 것.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 말들이 제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아버지가 남겨주신 말은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통해 저는 지금도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버지가 생각나는 날입니다.
오늘은 오래전 아버지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씀드립니다.
“아버지, 그때 하셨던 말씀처럼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어요.”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아버지가 제게 말씀하셨던 것은 단순히 여성이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미래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너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지 말아라.”
“세상이 정해 놓은 한계보다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아라.”
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아버지가 제게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많이 생각납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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