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newznls6857

  • 십자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예배를 경험합니다.

    아름다운 찬양이 있고, 감동적인 설교가 있으며, 따뜻한 교제와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져보고 싶습니다.

    “만약 십자가가 사라진다면, 그 예배는 여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교회 건물 안에 십자가가 걸려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살아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십자가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9)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선함 때문이 아닙니다.

    열심 때문도 아니고, 신앙 경력이 길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의 은혜 때문입니다.

    만약 십자가가 빠진다면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위로하는 시간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감동은 있을 수 있습니다.

    눈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감동이 반드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정, 그리고 10년의 시간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십자가 없는 기도는 쉽게 자기중심이 됩니다

    기도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도에는 자연스럽게 회개가 포함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반대로 십자가가 사라지면 기도는 점점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십자가는 장식이 아니라 중심입니다

    교회 안에 십자가가 걸려 있다고 해서 반드시 십자가 중심의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와 기도,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십자가가 살아 있는가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정말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가?”

    “정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십자가는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메시지가 아니라 변화시키는 메시지입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49527

    십자가는 시간을 넘어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예배를 드리는 한 시간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면, 월요일의 삶에서도 그 십자가가 우리의 선택을 바꾸어야 합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용서를 선택하고,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정직을 선택하며,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내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것.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가 됩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과거에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상징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그대로 붙잡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 받은 은혜가 삶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내 뜻만 고집한다면, 십자가는 여전히 우리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가 끝난 후부터 시작됩니다.

    교회 문을 나선 뒤에도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십자가를 비추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강조하면 너무 무겁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사역은 결코 십자가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선명하게 보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갑니다.


    십자가가 사라질 때 나타나는 모습

    십자가가 약해질수록 사람은 불편함을 피하려고 합니다.

    회개보다 공감이 중요해지고,

    거룩보다 편안함이 우선되며,

    순종보다 자기 이해가 강조됩니다.

    물론 공감도 중요하고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위로는 영혼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죄를 직면하게 하고, 은혜를 발견하게 하며,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교회의 모습이 변한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을 구하는 사람,

    화려한 무대보다 골방의 기도를 선택하는 사람,

    자신의 의가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붙드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진정한 예배는 완벽한 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드는 한 사람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

    “십자가는 예배의 장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예배가 살아 있으려면, 우리의 기도가 살아 있으려면, 언제나 십자가가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끌리는가?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끌리는가?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요즘 사회를 바라보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주장에 공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러한 이념의 일부 주장에 마음이 움직이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언어의 유사성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약자를 돕고,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며,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성경의 가르침과 비슷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 역시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외면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자신의 것을 나누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가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신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자발적인 섬김을 포함합니다.

    반면 어떤 사회주의적 또는 공산주의적 체계에서는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나 제도가 개인의 소유와 분배에 강하게 개입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겉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비슷하다고 해서 그 출발점과 목적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주장하는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의 근거와 인간관은 무엇인가”​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제와 구원의 차이

    성경은 가난한 이웃을 돌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님과의 단절, 곧 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회 제도를 개선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인 환경이 좋아진다고 해서 인간의 탐욕과 미움, 교만과 죄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단순히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복음은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사회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사회 문제의 해결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초대교회의 나눔은 공산주의였을까?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자신의 재산을 팔아 서로 나누었다면, 그것이 공산주의와 같은 것 아닌가?”

    사도행전에는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사도행전 2:44)

    그러나 초대교회의 나눔을 현대의 정치·경제 이념과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나눔은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나누는 공동체적 사랑에서 출발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국가의 권력으로 소유를 강제로 빼앗아 동일하게 분배하는 체계를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보면 베드로는 그들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사도행전 5:4)

    이 말씀은 초대교회의 나눔이 단순한 강제적 재산 공유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성경은 소유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소유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유한 사람에게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고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개인의 책임과 성실한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국가는 국민의 정서를 어떻게 돌보아야 할까요?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1702


    분노가 분별을 가릴 때

    불의와 부패를 보면 누구나 분노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외면받고 부유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가지는 것처럼 보일 때 사회에 대한 불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의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시 불의와 착취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분노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과정 없이 특정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로 이어질 때입니다.

    어떤 이념이 불평등을 해결하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이념의 모든 주장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유와 시장경제를 강조한다고 해서 그 모든 정책과 주장 역시 성경적으로 옳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념보다 말씀을 더 높은 기준에 두어야 합니다.


    자유와 책임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단순히 국가나 사회가 관리해야 하는 존재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성실하게 일하며, 자신의 소유를 선하게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관점에서 약자를 돕는 것과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며, 책임은 사랑을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는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도 필요하고, 동시에 개인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는 환경도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한쪽만을 절대화하기보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살펴야 합니다.


    복지와 사회주의는 같은가?

    복지는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 수단입니다.

    반면 사회주의는 사회와 경제를 바라보는 하나의 이념과 체계입니다.

    따라서 복지와 사회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와 약자를 돌보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동시에 자발적인 사랑과 책임도 함께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복지 자체를 무조건 반대할 이유도 없고, 반대로 어떤 복지정책이든 무조건 옳다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정책이 인간의 존엄과 책임, 자유와 공의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치에 비추어 하나씩 분별하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이념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특정 진영에 소속된 사람이기 전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보수든 진보든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옳은 것은 지지하고, 잘못된 것은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정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념이든 인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리스도인은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본성이 죄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 인간의 마음까지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좋은 제도도 죄 많은 인간의 손에 들어가면 악용될 수 있고, 좋은 의도로 시작한 정책도 권력과 탐욕에 의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정치와 이념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중요한 경계심입니다.


    사랑과 정의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불의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정의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약자를 돕되 인간의 존엄을 지켜야 하고, 불의를 비판하되 미움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되 의존만을 만들어서는 안 되며, 부유한 사람을 비판하되 부 자체를 죄악시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한 구호보다 더 깊은 지혜를 요구합니다.


    맺음말

    세상에는 수많은 이념과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이념은 평등을 강조하고, 어떤 이념은 자유를 강조하며, 또 어떤 이념은 성장과 복지를 강조합니다.

    각각의 주장 안에는 귀 기울여야 할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어떤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도 중요하고, 정의도 중요하며, 자유도 중요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가치가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힘만으로 완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우상을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세상의 이념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분별하고, 옳은 것은 받아들이며, 잘못된 것은 용기 있게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이 특정 이념이나 정치 지도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목소리가 아무리 커져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커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세상의 주장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분별하게 하소서.”

    우리의 생각과 선택이 어떤 이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왜 위험하다고 말할까요? 역사와 인간 본성으로 살펴 보는 이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왜 위험하다고 말할까요? 역사와 인간 본성으로 살펴 보는 이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왜 나쁘다고 하나요?”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단순히 정치 이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자유와 책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어떤 자리에 두는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처음부터 악한 의도로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자
    • 부의 불평등을 줄이자
    • 모두가 더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

    이러한 목적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매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좋은 의도만으로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성경은 인간을 매우 현실적으로 바라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성경은 인간이 완전하지 않으며, 누구나 권력과 욕심 앞에서 넘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사상은 종종 제도가 바뀌면 인간 사회가 이상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될 때,
    그 권력은 견제를 잃고 부패하기 쉬웠습니다.

    문제는 제도 자체보다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 안에 있는 죄성에 있습니다.



    *좋은 리더는 무엇으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능력보다 중요한 책임의 리더십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끌리는가?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개인의 자유와 책임

    성경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로마서 14:12)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독립된 인격체이며,
    각자의 삶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집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체제에서는 개인보다 국가나 집단의 목표가 우선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인데,
    때로는 체제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1702

    하나님보다 체제가 앞설 때

    신앙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여기에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적 세계관 위에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혁명과 체제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어떤 국가도,
    어떤 지도자도,
    어떤 제도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만약 국가나 이념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된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려는 또 다른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가 남긴 교훈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많은 사례를 보아 왔습니다.

    소련,
    중국의 문화혁명,
    북한,
    캄보디아 등 여러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고
    • 종교의 자유가 억압되었으며
    • 수많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물론 모든 사회주의 정책이 동일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고 자유가 제한될 때,
    비슷한 문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16)

    결국 어떤 사상이든 그 열매를 통해 평가받게 됩니다.


    성경은 불평등을 방치하는가?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거나 불평등을 방치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약자를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며,
    서로 나누라고 가르칩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강제적인 평등이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과 나눔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국가의 강요 때문에 재산을 나눈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행전 2:45)

    사랑 없는 평등은 억압이 될 수 있고,
    자유 없는 정의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 입장의 차이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 인간의 죄성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 권력이 국가에 집중될 위험이 있으며,
    •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약화될 수 있고,
    • 하나님보다 체제에 더 큰 기대를 걸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 사회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이념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소망이 인간의 체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강제적인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정치 체제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바라보며 드리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볼 때
    수많은 사상과 이념, 가치관이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봅니다.

    때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기 어려울 때도 있고,
    사람의 말과 주장에 이끌려
    진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지,
    자유와 책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를
    바르게 살펴볼 수 있게 하옵소서.

    특별히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욕심과 권력에 대한 욕망,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죄성이
    어떤 제도와 이념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사람을 신뢰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제도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를 귀하게 여기되
    그 자유를 자기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게 하시고,
    자유와 함께 주신 책임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또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게 하시고,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돕는다는 명분 아래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중심성과 탐욕, 교만과 지배욕​부터 돌아보게 하옵소서.

    세상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정작 내 안에 있는 욕심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주님의 말씀 앞에 세우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역사 속에서 배우는 지혜를 주시고,
    오늘을 살아가는 분별력을 주시며,
    내일을 준비하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
    사람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기게 하시고,
    세상의 이념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시며,
    사람의 힘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사회에도
    진리와 정의가 세워지게 하시고,
    거짓과 선동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며,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기보다
    존중하고 대화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자유와 책임, 정의와 사랑이 함께 세워지는 곳이 되게 하시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나라와 삶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오늘도 세상의 수많은 주장 가운데서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바르게 세워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끝까지 머무는 신앙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끝까지 머무는 신앙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문득 이런 질문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끝까지 주님 안에 머무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은 믿음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나오는 물음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질문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그 마음 자체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십자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도움을 구합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을 찾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문제의 해답보다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내 생각과 판단보다 주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 태도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온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 편에 서기를 선택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의지하는 법을 배워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머무는 신앙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4)

    우리는 종종 이 말씀을 들으며 흔들리지 않는 강한 믿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거함’은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흔들릴 때도 떠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을 때도 등을 돌리지 않으며, 넘어졌을 때 다시 돌아오는 관계의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머무는 신앙은 완벽한 신앙이 아니라 떠나지 않는 신앙입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7936

    끝까지 머무르기 위해 필요한 것

    1. 하나님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기

    하나님을 형통의 도구나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마음이 쉽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목적이 되면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관계는 계속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보다, 주님과 함께 걷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믿음이 오래 갑니다.

    2. 감정보다 방향을 붙들기

    신앙생활에는 뜨거운 날도 있지만 메마른 날도 있습니다.

    기도가 잘되지 않을 때도 있고,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마음이 따라오지 않아도 주님 쪽을 향해 서 있으려는 선택, 그것이 바로 머무름입니다.

    3. 자신의 힘으로 버티려 하지 않기

    오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은 특별히 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가져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가는 이유는 강해서가 아니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4. 기다림을 실패로 해석하지 않기

    하나님의 응답이 늦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했지만 변화가 보이지 않고,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는 있어도 우리를 버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기다림을 버림받음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신뢰하며 걸어갑니다.

    하나님께 붙잡히는 신앙

    돌아보면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붙들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나를 붙들고 계시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힘들어도 다시 기도하게 되고, 넘어져도 다시 주님께 돌아오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하나님을 붙잡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잡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머무는 사람은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라, 오늘도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고백이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주님, 저는 여기 있습니다.”

    그 한마디를 들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

  • 이유를 몰라도 흘러나오는 감사, 그것이 진짜 감사입니다.

    이유를 몰라도 흘러나오는 감사, 그것이 진짜 감사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사할 이유가 있을 때 감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감사하고, 기도한 것이 응답되었을 때 감사하고,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물론 이런 감사도 귀한 감사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 다른 감사가 있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유를 다 알지 못하는데도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오는 감사입니다.

    무언가 특별히 좋은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감사가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감사할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참된 감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사할 이유가 있을 때의 감사

    우리는 대부분 눈에 보이는 이유를 가지고 감사하는 데 익숙합니다.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도했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사하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감사하고,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감사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감사하기도 합니다.

    이런 감사는 자연스럽습니다.

    좋은 일이 생겼는데 감사하지 않는 것보다 감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조금 더 깊어지면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감사할 수 있는가?”

    기도했지만 아직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감사의 깊이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좋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

    참된 감사는 상황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좋으면 감사하고 상황이 나쁘면 감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감사는 결국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감사는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지금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앞날을 볼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앞날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왜 이런 일을 지나고 있는지 알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은 제가 왜 이런 상황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믿음에서 나오는 감사가 아닐까요?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58559



    이유를 몰라도 감사가 흘러나올 때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분명 힘든 상황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마음속에서 감사가 올라올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특별히 감사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 앞에 앉아 있으면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저는 그런 감사가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감사의 근거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변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보다 더 귀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감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할 때 그 안에는 사실 이런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저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제 앞길을 보고 계십니다.”

    “저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보다 더 크신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감사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드릴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감사가 기도보다 먼저 나오기도 합니다.

    “주님, 이것을 해결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

    “주님, 그래도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조금 달라집니다.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감사한다고 해서 아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감사한다고 해서 힘든 일이 힘들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이 나는 상황에서 억지로 웃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픈데 아프지 않은 척할 필요도 없습니다.

    힘든데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도 아십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울면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다 내려놓고 나면, 이상하게 마지막에는 감사의 고백이 남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계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그 감사가 귀한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앞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일을 내가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내일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사가 신뢰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보다 앞서 가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응답의 결과보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몰라도 흘러나오는 감사

    어쩌면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감사의 이유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이 함께 계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면,

    나중에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특별한 이유를 찾지 않아도 마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그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감사하고,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시기에 감사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길을 알고 계시기에 감사하고,

    내 삶을 붙들고 계시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참된 감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는 환경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감사할 이유를 찾아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게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가운데서도 감사할 이유를 찾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응답되지 않은 기도 때문에 낙심하고 있다면,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기에 감사합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아 두렵다면,

    “내가 보지 못하는 길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에 감사합니다.”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는 상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을 없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면서도 그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답을 얻지 못했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유를 알지 못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내가 지금 상황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구나.”


    이유를 몰라도 흘러나오는 감사

    저는 그런 감사가 제 삶에 더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힘든 날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응답을 받았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직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

    모든 이유를 이해한 후에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쩌면 진짜 감사는

    “주님, 이것이 좋아서 감사합니다.”

    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 이것이 왜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기에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무런 이유를 찾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어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어도,

    아직 기다려야 하는 응답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으며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유를 몰라도 흘러나오는 감사,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짜 감사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상황을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유를 다 알지 못해도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악인의 결말, 그리고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삶

    악인의 결말, 그리고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삶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마음이 답답해질 때가 있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고,
    불의한 사람이 오히려 형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특히 사회와 나라의 여러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정말 하나님은 보고 계실까?”
    “악은 왜 이렇게 오래 버티는 걸까?”

    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올라오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악인의 번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악인이 한때 성공하고 형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향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사람이 지나갈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시편 37:35-36)

    그들은 거대한 나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권력도 있고,
    재물도 있고,
    사람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번영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크고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인식되어지면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악은 결국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성경은 악이 단순히 남을 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악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가 판 웅덩이에 자기가 빠졌도다.”
    (시편 7:15)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고,

    불의는 또 다른 불의를 낳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향해 던진 칼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칼은 자신을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악은 언젠가 스스로 무너집니다.


    최종적인 심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을 심판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성경은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시편 7:11)

    세상의 법망을 피할 수도 있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선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감춰진 것이 없습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누가복음 8:17)

    그래서 믿는 사람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며 기다리는 법을 배워 갑니다.


    악인의 길은 결국 망합니다

    시편 1편은 의인과 악인의 마지막을 비교합니다.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여기서 말하는 망함은 단순한 실패나 가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이 결국 도달하게 되는 종착지를 말합니다.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하나님 없는 길은 생명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악이 영원히 존재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보여 줍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거짓도,
    억압도,
    눈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요한계시록 21:4)

    그들은 잠시 세상을 흔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놀라운 사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저 사람이 악인이다”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모두를 향해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우리는 종종 악인을 세상 어딘가에 있는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15793

    바울과 베드로의 이야기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한 사람은 핍박자였고,

    한 사람은 배신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단지 심판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회개하게 하셨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악인의 결말은 사실 두 갈래로 나뉩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인의 결말은 단순히 멸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사람

    • 자신의 죄를 붙들고 살아감
    • 하나님을 거부함
    •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
    • 악인의 길은 망함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

    • 자신의 죄를 인정함
    • 회개함
    • 십자가의 은혜를 붙듦
    • 새 생명을 얻음

    하나님은 어떤 길을 더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에스겔 33장 11절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 줍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하나님은 심판을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의 멸망보다도
    그들이 변화되는 은혜를 더 크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며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왜 악한 사람은 잘되는 것 같고,
    왜 정의는 더디게 오는 것처럼 보일까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악인의 형통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늦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또한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분노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공의를 신뢰하고,
    은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람을 향한 정죄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며,

    동시에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결국 역사의 마지막 주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에스겔 33:11)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그 사실이 오늘 우리의 분노를 인내로,
    답답함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기를 소망합니다.
    🙏🏻✨

  • 회개할 수 있는 마음,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보시는 가치

    회개할 수 있는 마음,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보시는 가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죄의 크기에 집중합니다.

    어떤 죄가 더 크고,
    어떤 죄가 더 심각한지,
    누가 더 의롭고 누가 더 부족한지를 따져 보곤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라보면서 쉽게 판단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의 실수를 발견하면 지나치게 자신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만이 아닙니다.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죄를 인정할 수 있는가,
    잘못을 고백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가.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매우 귀하게 보시는 마음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회개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성경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완벽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모세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사람이었지만 인생의 한 시점에서 매우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셨을까?”

    그들이 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연약했고 실수했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다윗의 삶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끝까지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통회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귀한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마음이 귀한 것입니다. 🌿


    회개는 실패가 아니라 은혜의 시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를 실패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숨기고, 실수를 변명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랬어.”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잖아.”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설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잘못 자체를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릅니다.

    회개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를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실패의 끝이 아니라 은혜의 시작입니다. ✨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밀어내시는 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문입니다.


    회개와 정죄는 다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와 정죄는 서로 다릅니다.

    정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밖에 안 돼.”

    “나는 너무 큰 죄를 지었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에 계속 머물게 되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보다 숨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회개는 방향이 다릅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주님께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정죄는 우리를 주저앉게 하지만, 회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음 아파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은 강한 사람보다 부드러운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보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에는 겸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자신의 생각이 항상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은 다릅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님, 제 마음을 바꾸어 주세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마음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했을 때 하나님께 돌아올 줄 아는 사람입니다. 🌿


    *죄란 무엇인가? 죄의 본질— 나는 왜 내 죄를 스스로 보지 못하는가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33910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점점 굳어지면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반복되면서 아무렇지 않게 느껴집니다.

    양심의 소리가 들려도 무시하게 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자신에게 적용하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게 됩니다.

    “저 말씀은 저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살아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깨닫게 하실 때 그것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작은 잘못이라도 하나님께 고백하게 됩니다.

    때로는 기도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때 마음이 불편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내려놓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연약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


    다윗과 사울에게서 생각해 보는 회개

    성경에서 다윗과 사울을 함께 생각해 보면 회개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두 사람 모두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대하는 태도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보다 자신의 체면을 지키려 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 앞에서 깊이 통회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킬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어느 방향으로 돌아서는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진 자리에 영원히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일어나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회개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았는지,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내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생각이 항상 옳다고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발견했다면 너무 오래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바로 가져가면 됩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짧은 고백 하나가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회개는 거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이 시작입니다.


    가장 소중한 영적 자산

    세상은 능력과 성취를 가치 있게 여깁니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얼마나 큰 일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른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것은 언제든지 자신을 낮추고, 언제든지 말씀 앞에 서며, 언제든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소중한 영적 자산은 지식도, 경험도, 능력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있는 사람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실수해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길을 잃어도 다시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을 지키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식되어질수록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보게 됩니다.

    빛이 밝아질수록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까이할수록 우리의 마음에 있는 작은 모습들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실 때 변명하기보다 즉시 인정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고백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고백은 우리가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죄를 지으면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숨고 싶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던 것처럼, 우리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보다 멀어지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숨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솔직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제가 숨지 않겠습니다. 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이어주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


    마무리하며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령님의 음성에 반응하며,

    잘못을 깨달을 때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 말입니다.

    혹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면 용서하기를 힘쓰고,

    누군가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면 먼저 손을 내밀고,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면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회개는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지 않고,

    말씀 앞에서 부드럽게 반응하며,

    잘못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즉시 돌아갈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우리의 능력보다 회개하는 마음을,

    우리의 의로움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자랑보다 겸손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굳어지지 않고,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 회개하는 죄인과 끝까지 악을 붙드는  사람의 차이

    회개하는 죄인과 끝까지 악을 붙드는 사람의 차이

    회개하는 죄인 & 끝까지 악을 붙드는 사람

    우리는 종종 사람을 판단할 때 그가 저지른 행동만을 보고 결론을 내립니다.

    큰 죄를 지으면 악인이라 부르고,
    실수가 적으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쉽게 그 사람을 정죄하고, 반대로 겉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조금 다른 시선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느냐만을 가지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죄를 깨달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진리가 자신의 잘못을 비추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돌아가느냐?”

    바로 이 질문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모두 같은 모습은 아닙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실수하고, 넘어지고, 때로는 알고도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은 사람과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성경의 기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심각한 죄와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죄를 지었느냐의 여부만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울을 위대한 사도라고 부릅니다.

    복음을 전했고, 수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도 어두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고, 성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기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당시의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좋은 의도로 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끝까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돌이켰습니다.

    바울의 과거가 없었던 일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저질렀던 일이 지워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붙들고 살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죄를 지었던 사람이었지만 회개를 통해 새로운 방향으로 걸어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고백했던 제자였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상황이 달라지자 베드로는 두려워졌습니다.

    결국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느꼈을 절망은 얼마나 컸을까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완전히 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야기는 실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가볍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실패를 붙들고 살아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고, 다시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다윗 역시 무거운 죄를 범했습니다

    다윗을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사랑받은 왕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에도 결코 가볍지 않은 죄가 있었습니다.

    그는 밧세바와 간음했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드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라고 말할 수 없는 큰 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의 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나단을 몰아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깊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랑하며 끝까지 붙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죄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죄인과 악인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타날까요?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악인은 단순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일까요?

    성경은 악인의 특징을 단순히 죄의 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진리가 자신을 비추는 것을 싫어하는 태도에서 악인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고 돌이킬 수도 있습니다.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끝까지 죄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보여 주셔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화를 냅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한다.”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했다.”

    이렇게 계속해서 자신의 죄를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붙듭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에는 자기합리화가 자리 잡습니다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하면 마음이 점점 굳어집니다.

    처음에는 작은 변명으로 시작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상대방 때문이었어요.”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셔도 마음을 닫게 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고백이 시작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분별력이 있는 자들은 본질을 추구합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1134


    악인은 빛보다 어둠을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빛이 비추면 감추어 두었던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면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욕심이 보일 수 있습니다.

    미움이 보일 수 있습니다.

    교만이 보일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것인가?

    아니면 빛을 거부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회개하는 사람은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프고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반면 끝까지 악을 붙드는 사람은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는 사람을 미워하고, 말씀의 책망을 거부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라는 말은 단순히 입으로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방향의 변화가 있습니다.

    내가 가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회개했다고 해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전과 똑같은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과,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넘어졌을 때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잘못했을 때 용서를 구하는 것.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조금씩이라도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가는 것.

    이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과거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과거를 쉽게 기억합니다.

    “저 사람은 예전에 저런 일을 했어.”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한 번의 잘못을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에는 과거의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핍박자에서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이었지만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도로 쓰임 받았습니다.

    다윗 역시 큰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사람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을 새롭게 빚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완전히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요?

    우리 자신도 이 말씀 앞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면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야.”

    라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혹시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외면하고 있는 영역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설교를 들으면서 “저 말씀은 저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의 잘못은 크게 보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지 않은지,

    하나님께서 고치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자존심 때문에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회개는 다른 사람을 향한 말이 아니라 가장 먼저 나 자신을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때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말씀을 통해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설교를 통해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마음을 찌르는 말씀으로 깨닫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통해 우리의 잘못을 보여 주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겪는 상황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들은 후 우리의 반응입니다.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씀을 밀어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어.”

    “내가 왜 사과해야 해?”

    “내가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어.”

    라고 자신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제 생각을 너무 앞세웠습니다.”

    “제가 교만했습니다.”

    “제가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제가 하나님보다 제 자존심을 붙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진짜 문제는 죄의 크기보다 마음의 방향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을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후 끝까지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한 사람은 빛 앞에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빛을 피해 자신의 모습을 감춥니다.

    한 사람은 죄를 인정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죄를 정당화합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의를 붙듭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다른 한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길을 고집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너는 죄를 지었느냐?”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이 있습니다.

    “너는 죄를 깨달았을 때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회개조차 우리의 힘으로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우쳐 주시고,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시며, 다시 하나님을 찾도록 이끄시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지어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작은 잘못 하나에도 마음이 아프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 차이는 단순히 성격의 차이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것을 부끄러워하기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제가 이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 마음을 바꾸어 주십시오.”

    “다시 같은 길로 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는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은혜의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에게 조용히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내 잘못을 인정하는가?

    아니면 먼저 변명하는가?

    내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사과할 수 있는가?

    아니면 상대방의 잘못을 먼저 이야기하는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내 마음을 비추실 때 그 빛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불편하다는 이유로 말씀을 밀어내는가?

    나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죄를 붙들면서도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가?

    이 질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한 질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귀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애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벽함만이 아닙니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마음,

    잘못했을 때 인정하는 마음,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돌아오는 마음,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어디로 돌아가느냐입니다.

    자신의 의를 붙들고 일어나려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다시 일어날 것인가?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때문에 은혜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마무리하며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도 우리가 붙들고 놓지 않는 것이 있지는 않습니까?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미움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붙들고 있는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끝까지 변명하고 정당화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까요?

    베드로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바울처럼 자신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삶의 방향을 돌이켜야 할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렇게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죄를 보게 해 주십시오.”

    “제가 변명하지 않게 하시고, 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게 해 주십시오.”

    “죄를 붙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넘어졌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오늘도 죄를 붙들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깨닫는 순간 하나님께 돌아가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질 때 그 빛을 피하지 않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제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여 주십시오.”

    이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다시 주님을 향해 걸어가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느림의 미학, 서두르지 않을 때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들

    느림의 미학, 서두르지 않을 때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들

    느림의 미학

    우리는 늘 빠름을 요구받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더 빨리 결정해야 하고,
    더 빨리 성과를 내야 하며,
    더 빨리 원하는 곳에 도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터넷도 빨라야 하고,
    일의 처리도 빨라야 하며,
    사람들의 답변도 빨라야 합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조차 답답하게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느리다’는 말이 마치 부족함이나 뒤처짐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으면 불안해집니다.

    다른 사람은 앞서가는 것 같은데 나는 제자리에 있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은 이미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나는 아직 준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조급해집니다.

    ‘나도 빨리 해야 하는데…’

    ‘이러다가 나만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하지만 삶을 조금 더 오래 살아보니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대부분 느린 시간을 통과하며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의 인격도 그렇고,
    신뢰도 그렇고,
    깊은 관계도 그렇고,
    믿음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어 가시는 일 역시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느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느림은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느림은 서두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천천히 걸을 때는 눈에 들어옵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보입니다.

    길가에 피어난 작은 꽃도 보이고,
    나뭇잎의 색깔도 보이고,
    늘 지나치던 동네의 모습도 새롭게 보입니다.

    빠르게 움직일 때는 목적지만 보입니다.

    하지만 천천히 걸으면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바쁘게 살아갈 때는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의 상태가
    잠시 멈추어 설 때 비로소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많이 지쳐 있구나.’

    ‘나는 생각보다 사람의 인정에 많이 흔들리고 있었구나.’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과를 너무 조급하게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느림은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깊이 바라보게 하는 시선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십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과정에도
    기다림의 시간이 자주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약속을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요셉에게도 꿈을 받은 이후 긴 시간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왕궁을 떠난 뒤 광야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윗 역시 기름 부음을 받은 후 바로 왕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는데도
    그 약속이 곧바로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만 만들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감당할 사람도 함께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빨리 얻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결과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다루십니다.

    능력을 주시기 전에 성품을 다루시고,
    자리를 주시기 전에 겸손을 가르치시며,
    사역을 맡기시기 전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장 깊이 일하고 계시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에는 보이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씨앗을 땅에 심었다고 해서
    다음 날 열매가 맺히지는 않습니다.

    씨앗은 한동안 보이지 않습니다.

    땅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뿌리가 내리고,
    싹이 준비되고,
    생명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 이와 같습니다.

    기도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오히려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가장 중요한 일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서두르다 보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빠르게 사는 것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신속한 결정이 필요하고,
    즉시 행동해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버튼 하나를 누른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상처가 회복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고,
    신뢰가 쌓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렇습니다.

    오늘 가르쳤다고 내일 바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내가 오늘 한 말 한마디가
    언제 그 사람의 마음에 심겨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결과를 서두르기보다 과정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시간을 인정하는 것도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느려질 때 내 마음이 보입니다

    사실 우리가 바쁜 것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쁠 때는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계속 사람을 만나고,
    계속 일하고,
    계속 움직이고 있으면
    내 안의 외로움이나 불안도 잠시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멈추면 보입니다.

    내가 얼마나 조급했는지,

    얼마나 인정받고 싶었는지,

    얼마나 결과에 집착했는지,

    얼마나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고 있었는지가 보입니다.

    그래서 멈춤은 때로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실 수 있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서두르고 있니?’

    ‘무엇이 그렇게 두렵니?’

    ‘정말 네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하겠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기다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했지만 결과는 내가 정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시간 안에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때와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늦어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정확한 때일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돌아가는 길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통해 나를 준비시키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살아가는 시간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의 순종은 내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3062


    예수님도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이 원하는 속도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급하게 요구한다고 해서
    그 요구에 끌려다니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혼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을 때도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걷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준으로 서두르고 있는가?

    사람들의 기대 때문인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인가?

    내가 뒤처질까 두렵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께서 지금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인가?

    이 질문을 한번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느린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사람을 보여 주십니다

    사람을 알아가는 데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순간에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화를 내는지,

    어떤 말에 상처받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순간에 욕심이 생기는지,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지가
    시간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느린 시간을 허락하실 때
    그 시간은 단순한 지연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시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진심을 보게 하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서두를 때는 관계의 겉모습만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심과 태도가 보입니다.


    느림 속에서 감사가 회복됩니다

    빠르게 살아갈 때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아직 갖지 못한 것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더 좋은 집,

    더 많은 돈,

    더 높은 자리,

    더 좋은 결과,

    더 많은 인정.

    계속 다음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오늘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가족,

    건강하게 걸을 수 있는 몸,

    따뜻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

    평범하게 맞이하는 아침,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시간.

    이런 것들은 너무 평범해서
    감사의 대상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면 보입니다.

    내가 이미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됩니다.

    느림은 우리에게
    감사를 회복시켜 줍니다.


    모든 늦음이 실패는 아닙니다

    혹시 지금 자신의 삶이 너무 느리게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남들은 앞서가는 것 같은데
    나는 아직 제자리인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원했던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아직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너무 빨리 자신의 인생을 실패라고 결론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늦었다는 것과 잘못되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잠시 멈출 수도 있습니다.

    다시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속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이끌고 계시는가입니다.


    느림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빠르게 응답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응답보다 먼저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우리는 빨리 문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문이 열리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키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느린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신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시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조금 천천히 걸어보면 어떨까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조금 천천히 살아보면 어떨까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하기보다
    잠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식사를 할 때는 음식의 맛을 느껴보십시오.

    가족과 이야기할 때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길을 걸을 때는
    주변의 풍경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루가 끝났을 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앉아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오늘 제가 놓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제게 보여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너무 서두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하다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은 때로 아주 작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
    언제나 거대한 사건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가족의 표정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사일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숨어 있던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내 삶 가운데 베풀고 계셨던 은혜일 수도 있습니다.

    빠르게 지나갈 때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멈추고 천천히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 곳곳에 남겨 놓으신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느림의 끝에는 깊이가 있습니다

    빠른 것은 편리합니다.

    하지만 깊이는 대개 천천히 만들어집니다.

    나무가 자라는 것도 시간이 필요하고,
    사람의 인격이 자라는 것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들었다고
    믿음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한 번 했다고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기다림을 지나고,
    수많은 기도와 순종을 경험하면서
    조금씩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에도
    느린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기다리고,

    순종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면서

    조금씩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빠른 것이 좋은 것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느리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늦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도 아닙니다.

    멈추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그 느린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 주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내 마음을 보여 주시고,

    사람의 소중함을 보여 주시고,

    이미 받은 은혜를 보여 주시고,

    내가 붙들고 있던 욕심을 보여 주시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삶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면
    너무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남들의 속도와 나의 속도를 비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고,

    오늘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순종해야 할 말씀에 순종하고,

    오늘 감사할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걸어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빨리 달리는 것보다
    천천히 걷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게 합니다.

    때로는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잠잠히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때로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천천히 걸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조금 천천히 걸어보십시오.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하늘을 바라보고,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내 마음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 모든 것 너머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늦었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깊이 만나고 계셨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느림은 멈춤이 아니라 깊어지는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작은 은혜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조급함보다 믿음을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 서두르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이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엄마도 몰라서 주님께 묻는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엄마도 몰라서 주님께 묻는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주님께 묻는 길

    얼마 전에 큰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지금의 선택이 맞는 것인지,
    언제쯤 이 막막한 시간이 지나갈지 알 수 없어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저 역시 쉽게 답을 해 줄 수 없어 답답했습니다.
    부모라면 자녀에게 분명한 길을 알려 주고 싶지만, 인생에는 부모도 대신 답해 줄 수 없는 질문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한동안 아이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바라보던 순간,
    제 입에서 자연스럽게 한마디가 흘러나왔습니다.

    “엄마도 몰라서 주님께 묻는단다.”

    그 짧은 한마디에 아이는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그 말은 아들 만을 위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길을 잃었던 지난날의 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주님께 길을 묻고 있는 제 삶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출처 :AI 창작 이미지 | ChatGPT(DALL·E) 활용 제작


    “엄마도 몰라서 주님께 묻는단다.”

    아이에게는 짧은 말이었지만,
    돌아보니 그 안에는 제 인생의 많은 시간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언제나 길을 물었던 사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도 몰랐고,
    가정을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도 몰랐고,
    자녀를 키우면서도 몰랐습니다.
    그럴 때 마다 제 힘으로 제 지혜로 하려고 했습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지금 하는 결정이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날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다 제 힘과 지혜라는 것이 얼마나 한없이 부족한 것인 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주님께 묻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님은 보고 계시니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돌아보면 제 인생은 제가 답을 잘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모를 때마다 하나님께 물으며 걸어온 시간이 쌓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그 말을 해 주고 난 후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과거의 간증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엄마도 몰라서 주님께 묻는단다.”

    이 말은 사실 지금의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전히 모르는 길 앞에 서 있습니다.

    여전히 기다려야 하는 문제들이 있고,
    여전히 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들을 지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믿음이 깊어지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것은 믿음이란?
    모든 답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믿음은 답을 모르면서도 주님께 묻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79605

    세상은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계산하고,
    더 많이 준비하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저는 이 말씀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아도 그분께 길을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주님께 묻습니다.

    예전과 같은 질문입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제가 알지 못하니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시오.”

    아이에게 했던 말이 다시 제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엄마도 몰라서 주님께 묻는 단다.”

    그리고 그 말 뒤에 이제 한 문장을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엄마는 지금도 하나님께 물어보고 있단다.”

    어쩌면 믿음의 사람은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길을 아시는 분께 계속 묻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압니다.

    제가 모르더라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제 손을 잡고 한 걸음만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질문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