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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옥은 어떤 곳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영원한 심판

    지옥은 어떤 곳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영원한 심판

    앞의 글에서 우리는 “지옥에 가는 것이 지금의 어떤 어려움보다도 훨씬 두려운 일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고, 관계의 어려움도 있으며, 건강과 직장, 자녀 문제로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눈앞의 고난만 바라보지 말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옥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사람을 겁주기 위한 종교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옥에 대해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사람들은 생각을 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지옥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지옥을 단순한 상징이나 비유 정도로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마지막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악인에게 임할 심판을 “영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또한 마가복음에서는 죄의 결과에 대해 매우 엄중하게 경고하시면서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지옥에 대한 경고는 사람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반복해서 경고하실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옥의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때 흔히 불, 고통, 어둠과 같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두려움은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며, 생명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 이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습니다.

    돌이킬 수도 없고,

    다시 선택할 수도 없으며,

    “그때 하나님을 찾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그래서 지옥은 단순히 “고통스러운 장소”​라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옥의 가장 무서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지옥을 그렇게 엄중하게 경고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죄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며,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해서는 매우 엄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로 사람이 그곳에 가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에 가면 위험해.”

    “그 길로 가면 안 돼.”

    “돌아서야 해.”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자녀를 겁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지옥에 대한 말씀은 우리를 공포에 빠뜨리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선택하도록 주시는 경고입니다.


    지옥에 대한 경고는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자신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종교적인 행동만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찬양을 부르는 것 자체가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정말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뜻만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유리한 것만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의 뜻보다 세상의 기준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옥에 대한 묵상은 결국 우리를 자기 자신에게로 데려옵니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누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가|성경이 말하는 천국과 구원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4317



    지옥은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가는 곳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실수를 많이 했는데 혹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까지 지은 죄가 너무 많은데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실까?”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완벽하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중심입니다.

    우리 중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우리의 의로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완벽해져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대한 글을 읽고 단순히 두려움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닫게 해 주세요.”

    “제가 제 뜻대로 살고 있다면 돌이키게 해 주세요.”

    “주님을 진심으로 알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해 주세요.”

    그것이 지옥에 대한 말씀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아올 시간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직 하나님께 돌아갈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숨을 쉬고 있고,

    오늘도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오늘도 기도할 수 있으며,

    오늘도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사람은 내일도 당연히 살아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내일을 보장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믿겠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다음 하나님께 돌아가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내일로 미루기보다 오늘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옥을 생각하면 지금의 삶을 다시 보게 됩니다

    평소에는 돈이 가장 중요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내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을 생각하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내가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은 영원한 것인가?”

    “내 삶의 주인은 정말 하나님이신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하나님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반대로 세상에서 조금 부족하게 살아가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뜻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 삶은 결코 실패한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옥에 대한 말씀을 가볍게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아름답고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심판에 대한 말씀도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죄가 아무 문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죄는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심각한 문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을 버리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대한 말씀을 묵상할수록 오히려 십자가의 은혜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셨구나.”

    “내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구나.”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옥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대한 묵상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 알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정말 믿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내 삶에서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오늘이 있습니다.

    아직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직 회개할 수 있습니다.

    아직 말씀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아직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대한 말씀은 우리에게 절망을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초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지금 자신의 삶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고 느껴진다면, 거창한 것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됩니다.

    조용히 주님 앞에 앉아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주님,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여 주세요.”

    “제가 주님의 뜻보다 제 뜻을 따라 살고 있다면 깨닫게 해 주세요.”

    “제가 주님을 잊고 살았다면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해 주세요.”

    그리고 말씀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의 마음을 구하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오늘 주어진 삶에서 작은 것부터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옥을 생각할수록 천국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히려 반대편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시간은 결코 가볍게 흘려보낼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지,

    어떤 것을 사랑하는지,

    어떤 말씀에 순종하는지,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삶이 힘들 때마다 단순히 “이 어려움이 언제 끝날까?”​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이 시간을 지나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 경고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며,

    오늘 주어진 삶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지옥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바라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마음을 구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오늘이 주어졌다는 것,

    아직 주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아직 돌이킬 수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정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정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는 법을 배웠고, 성경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한편에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떠올랐고, 어떤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질문은 다른 사람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교회에 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일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정말 같은 것일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했습니다.
    함께 교회에 가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신앙생활의 중요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정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손해를 보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부딪힐 때 무엇을 선택하는지.

    그런 순간마다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가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을 어느 날 남편에게 꺼냈습니다.

    결혼한 지 약 13년이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요?”

    아마 제 질문은 남편에게 너무 갑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화를 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그때는 저도 당황했습니다.

    왜 그 질문 하나가 그렇게 큰 감정을 불러일으켰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질문이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
    기도를 많이 하는 것,
    봉사를 많이 하는 것,
    예배를 빠지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은 소중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이루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길이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이라면 걸어가는 것.

    내 감정과 자존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서 다시 나를 돌아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

    남편의 좌절을 바라보며

    지금 남편은 자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깊은 좌절감을 표현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오히려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지 못하는 사람보다,

    “나는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가?”

    라고 고민하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진지하게 서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부족함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내딛는 믿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뜻을 먼저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정에 끌려갈 때가 있습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걸음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는 것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7894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완벽함의 길이 아니라 순종의 길입니다

    저 역시 여전히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 앞에서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삶을 살아갈수록 그 질문은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단지 마음속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갑니다.


    사랑은 선택이고, 순종이며, 삶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 한마디를 참을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저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조심스럽게 건네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은 우리의 말보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아직 걸어가는 중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바라보고, 다시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저도 오늘 다시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며,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삶을 살아가는 길.

    그 길을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걷고 싶습니다.

  • 하나님이 나를 거대한 KB증권사와 마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거대한 KB증권사와 마주하게 하셨습니다

    거대한 KB증권사와 마주하다

    살다 보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리에서
    큰 일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일이 찾아왔습니다.

    처음부터 누군가와 싸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금융회사와 법정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내가 겪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그리고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은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kb증권사의 일로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제기했고,
    관련 자료들을 확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단순한 금융 거래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일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저는 KB증권사라는 거대한 금융회사와 민사소송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두려웠습니다.

    상대방은 거대한 금융회사였고,
    저는 법률 전문가도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에게는 여러 명의 변호사가 있었지만
    저는 혼자였습니다.

    처음 법원에 서류를 제출할 때만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제가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제가 가진 자료를 하나씩 제출하면서
    제가 왜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될수록
    이것이 단순한 소송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는 이것이 내가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지를 다시 묻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길을 허락하셨을까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났습니까?”

    처음에는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왜 이런 손실을 겪어야 했는지,
    왜 이렇게 복잡한 문제를 만나게 되었는지,
    왜 하필 제가 거대한 kb증권사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질문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제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

    문제를 없애 달라고만 기도했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는
    이 문제를 지나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제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걷는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법률도 잘 모르고,
    복잡한 금융거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 재판을 준비하면서 수없이 막혔습니다.

    자료를 다시 확인하고,
    기록을 읽고,
    앞뒤 내용을 맞춰보고,
    제가 이해한 것을 글로 정리했습니다.

    때로는 너무 지쳤습니다.

    “여기까지 해야 하나?”
    “그냥 포기하면 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자리까지 정직하게 걸어가면 된다.

    그리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 끝까지 걸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내 마음을 붙드셨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8045

    1심 판결을 받고 난 후

    2026년 8월 18일,
    1심 판결을 받았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결과와는 달랐습니다.

    솔직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동안 준비했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제가 주장했던 내용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제 마음속에는 또 다른 생각이 생겼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구나.”

    저는 항소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제가 겪은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습니다.

    왜 이 사건이 시작되었는지,
    그날 kb증권사 계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자료를 확인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제가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하나씩 기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지나오면서
    저는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제가 이 일을 기록할 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제가 운영하고 있던 블로그들이 있었습니다.
    그 블로그들은 모두 최근에 만들어 진 것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각각 다른 목적으로 시작했던 공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그 공간들이 앞으로 제가 걸어갈 길을 기록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건을 기록하는 공간도 필요했고,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공간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제가 겪은 이 일을 단순히 ‘소송 이야기’로만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거대한 상대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KB증권사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여전히 제게는 큰 상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대방의 크기만 바라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제가 이 사건의 결과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항소의 결과도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도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일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동안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로 부르신 이유를 아직은 모릅니다

    아직 저는 이 사건의 끝을 모릅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를 이 거대한 kb증권사와 마주하게 하셨는지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끝까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믿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의미 없이 제 삶에 이 일을 허락하신 것은 아닐 것이라고.

    지금은 그저 한 걸음씩 걸어가려고 합니다.

    두려우면 두려운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때로는 마음이 흔들리더라도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걸어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길의 끝에 서게 되었을 때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는 왜 이런 길을 걷게 하셨는지 몰랐지만,
    돌이켜보니 하나님께서 제 걸음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저는
    거대한 KB증권사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제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KB증권사가 아닙니다.

    그보다 크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갑니다.

  • 죄란 무엇인가? 죄의 본질— 나는 왜 내 죄를 스스로 보지 못하는가

    죄란 무엇인가? 죄의 본질— 나는 왜 내 죄를 스스로 보지 못하는가

    죄의 본질? 우리는 흔히 죄를 생각할 때 먼저 행동을 떠올립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 남을 미워하는 것, 욕심을 부리는 것,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잘못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들도 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뜻보다 내 생각과 욕망을 앞세우는 것,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로마서 3:23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보다 정직하게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법을 잘 지키고 선한 일을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거의 주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죄가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나는 나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 살아왔고, 하나님의 뜻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며 살아왔다.”

    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왜 나는 내 죄를 스스로 보지 못할까요?

    바로 죄의 본질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죄가 그렇게 심각하다면 우리는 왜 자신의 죄를 잘 보지 못할까요?

    성경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 매우 엄중하게 말씀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 예레미야 17:9

    사람은 자신의 죄를 바라볼 때조차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화를 냈다면

    “그 사람이 먼저 나를 화나게 했어.”

    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은 미움받을 만한 사람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부렸다면

    “나도 이 정도는 가져야 하지.”

    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도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은 쉽게 보면서도 자신의 마음속 죄는 합리화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죄의 무서운 점은 단순히 죄를 짓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9941


    *복음이란 무엇인가 — 성령의 비추심으로 복음을 깨닫다

    3. 죄는 행동보다 먼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죄의 본질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단순한 행동의 문제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이 살인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음욕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탐심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교만 역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 이전에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행동만 고치려고 하면 죄의 뿌리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달라졌는데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주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죄는 행동의 문제이기 전에 죄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문제입니다.


    4.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완전히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요한복음 16:8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죄에 관한 지식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때 비로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했던 것이 사실은 교만이었구나.”

    “내가 화를 낸 이유가 단순히 상대방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 뜻대로 살고 싶어 했구나.”

    “나는 하나님보다 돈과 사람과 내 안전을 더 의지하고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죄에 대한 지식과 죄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의 차이입니다.


    5. 성령의 비추심은 우리를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죄의 본질을 이해하고 죄를 깨닫게 되면 처음에는 마음이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훨씬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죄를 드러내시는 목적은 우리를 정죄하여 절망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죄를 보게 하심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지 절실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기 시작하면 고백이 달라집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힘으로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고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6. 죄를 깨닫는 사람에게 십자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을까요?

    인간의 죄가 그렇게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십자가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음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이며 내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깊이 깨닫는 것은 복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자리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7. 진정한 회개는 죄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깊은 회개는 행동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행동 뒤에 있는 내 마음을 바라보게 합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

    무엇을 원했는가?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무엇을 의지했는가?

    하나님보다 무엇을 더 사랑했는가?

    이 질문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죄의 뿌리를 조금씩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8.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절망의 고백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요한일서 1장 8-9절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지만,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죄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는 사람은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게 됩니다.


    9. 오늘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의 문제도 보입니다.

    세상의 타락도 보입니다.

    교회의 문제도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위선도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비추신다면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내 안에 있는 교만은 무엇일까요?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얼마나 클까요?

    용서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마음은 없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정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 질문 앞에 조용히 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무리 — 죄를 보는 눈이 열릴 때 복음이 보입니다

    죄의 본질을 이해 하고 죄를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는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안에서 발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때 우리는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훨씬 심각한 죄인이었구나.”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구나.”

    죄를 깨닫는 것은 복음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깊이 깨달을수록 십자가의 은혜가 더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다른 사람의 죄를 보기 전에 먼저 제 죄를 보게 해 주세요.

    제가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속이지 않게 해 주세요.

    성령께서 제 마음을 비추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저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죄를 보았을 때 숨거나 변명하지 않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세요.”

    죄를 보는 눈이 열릴 때, 복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복음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지를 알게 되며

    죄의 본질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생명이 없음을 고백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죄의 본질을 깨닫고 바라 볼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축복입니다.

  • 욥,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욥,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욥의 고난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납니다.

    분명히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려움이 찾아오고,
    기도했는데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려고 애쓰는데 오히려 삶이 더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성경의 욥은 바로 그 질문 앞에 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욥기는 단순히 고난을 잘 견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사람, 욥

    욥기 1장은 욥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었던 이유가 단순히 자신의 삶이 평안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은 욥의 삶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먼저 보여줍니다.

    욥은 고난이 시작되기 전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자신의 몸마저 심각한 고통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한순간에 평안했던 삶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욥이 처음 보인 반응은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물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짜 믿음의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욥은 왜 고난을 당했을까?

    우리는 욥기의 처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욥에게 일어난 일의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 자신은 몰랐습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버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욥기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전체적인 이유를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서 쉽게 판단합니다.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일 거야.”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일 거야.”

    욥의 친구들이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계속해서 그의 고난에는 반드시 죄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욥의 친구들에게 그들의 말이 옳지 않았음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모든 고난을 죄의 결과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보다 더 힘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욥에게 가장 힘든 것은 단순히 재산을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녀를 잃은 슬픔도, 몸의 고통도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고통은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지 모르겠다”

    는 것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때로는 너무나 거칠고 절박한 말까지 쏟아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욥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울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답답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

    “왜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가​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놓친 것

    욥의 세 친구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변호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하나님에 관한 옳은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의 상황을 자신들이 알고 있는 틀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고, 악한 사람에게는 고난이 온다.”

    그렇다면 욥에게 고난이 왔으니 욥에게 반드시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삶을 바라보시는 방식과 달랐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한 부분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삶 전체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누군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때로는 설명보다 함께 울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충고보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지 내가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민사소송의 길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흔적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2519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모든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욥이 가장 원했던 것은 설명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모든 원인을 설명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욥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욥기의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욥은 상황에 대한 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하나님께 답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기도했는데 응답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제가 이런 길을 지나가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욥기의 가장 깊은 고백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달라졌습니다.

    고난 이전에도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난이 좋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은 지나고 나서야 그 시간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시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떠나셨던 것이 아니라
    제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욥의 회개는 무엇이었을까?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말을 돌이키고 회개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단순히

    “욥에게 큰 죄가 있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고, 마지막에 그 죄를 회개했다.”

    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욥기는 처음부터 욥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욥의 회개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큰 악을 행했다는 의미라기보다,
    자신이 하나님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데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안에 가두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기도했으니 반드시 이런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내가 옳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욥의 마지막 회복이 보여주는 것

    욥기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욥의 삶을 회복시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잃었던 것들을 다시 얻게 되고, 그의 삶은 다시 회복됩니다.

    하지만 욥기의 결론을 단순히

    “고난을 잘 견디면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신다.”

    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욥기의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욥에게 가장 큰 회복은 재산의 회복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녀와 삶의 회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 이전의 욥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지나온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우리의 삶에도 욥의 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오히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욥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설명보다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상황을 이해하는 믿음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욥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

    욥기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기도의 응답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만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의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그분을 사랑하는가?

    욥기는 이 질문을 우리 앞에 세워 놓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질문에 답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때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자리에서도

    “나는 지금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욥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났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온다면,

    그 시간을 단지 빨리 벗어나야 할 고난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울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입니까?”라고 물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 질문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답을 얻기 전에도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하나님께서 설명해 주시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욥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욥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어쩌면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깊은 만남은
    내가 모든 것을 이해했을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았을 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돈의 유혹은 왜 이렇게 무서운가? 돈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돈의 유혹은 왜 이렇게 무서운가? 돈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돈과 부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점점 돈의 유혹이 강해짐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주식과 ETF에 투자해야 할까?

    어떤 부동산을 사야 할까?

    노후를 위해 얼마를 모아야 할까?

    경제적 자유를 이루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이런 질문들은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이런 관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돈이 필요하고, 안정적인 삶을 원하고, 미래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돈을 좇는 이유가 정말 돈을 사랑해서만일까?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두려움입니다.


    돈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돈을 붙잡는다

    우리는 흔히 성경의 말씀을 생각하면 먼저 디모데전서 6장 10절을 떠올립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물론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분명 경계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다른 모습도 보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이유가 반드시 부자가 되고 싶어서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생각 때문일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노후에는 괜찮을까?”

    “갑자기 병원비가 많이 나오면 어떻게 하지?”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지?”

    “집값이 오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가진 것을 잃으면 어떻게 하지?”

    “자녀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을 붙잡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든 삶의 구조가 됐습니다. 그래서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더 모으고 싶어집니다.

    투자를 하고 싶어집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자산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돈을 사랑해서 붙잡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두려워서 붙잡고 있는 것일까?


    돈의 유혹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습니다

    돈의 유혹은 단순히

    “더 많이 가져라.”

    라는 모습으로만 찾아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가지고 있지 않으면 위험하다.”

    라는 두려움입니다.

    욕망은 우리에게 더 많이 가지라고 말하고,

    두려움은 우리에게 가진 것을 절대로 놓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아지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걱정은 끝나지 않습니다.

    100만 원이 부족할 때는 100만 원만 더 있으면 될 것 같고,

    1,000만 원이 생기면 이제 1억이 있어야 안심될 것 같고,

    1억이 생기면 노후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돈이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버립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돈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주는 안전감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돈의 유혹보다 더 무서운 부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돈이 있어야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돈의 유혹 즉, 두려움이 찾아오면 우리는 미래를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자산의 가치를 계산하고,

    투자 수익률을 확인하고,

    부동산 가격을 살펴보고,

    앞으로 필요한 돈이 얼마나 될지 계산합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혜롭게 준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돈이 충분해야 나는 안전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돈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돈이 건강을 완전히 지켜줄 수 있을까요?

    가족의 관계를 지켜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 줄 수 있을까요?

    죽음을 막아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마음을 정확하게 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재물을 많이 쌓아 놓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사람은 풍년이 들자 더 큰 곳간을 짓고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20-21)

    이 말씀에서 무서운 것은 그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돈을 통해 자신의 미래와 안전을 확보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돈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저 자신에게도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

    통장 잔고가 줄어들면 불안해하고,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미래가 무너질 것처럼 두려워하고,

    투자한 자산의 가치가 떨어지면 마음까지 함께 흔들린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 앞에서 불안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현실적인 걱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점점 커져서

    “돈이 없으면 나는 안전하지 않다.”

    라는 생각으로 굳어지기 시작하고 돈의 유혹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는 한번 멈춰서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돈이 하나님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돈보다 먼저 ‘염려’를 말씀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재물에 대한 말씀을 하신 뒤 염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25)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를 모른 척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필요하고,

    입을 것이 필요하고,

    살아가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보다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시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33)

    이 말씀은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돈을 준비하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돈이 없을까 두려운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기

    저는 이 부분이 믿음의 중요한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이 생기고 돈의 유혹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없을까?”

    라고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 자체를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돈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미래가 걱정됩니다.”

    “제가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있는데도 그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돈을 붙잡고 두려움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돈을 준비하는 것과 돈을 의지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저축할 수 있습니다.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노후를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재산을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마음속에 이런 믿음이 생긴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이 정도 돈이 있어야 내가 안전해.”

    “이 정도 자산이 있어야 내 인생이 괜찮아.”

    “돈만 충분하면 어떤 일이 와도 견딜 수 있어.”

    그때 우리는 돈을 준비하는 것을 넘어 돈을 의지하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돈은 우리의 삶을 돕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의 유혹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은 ‘무엇을 믿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돈의 문제를 단순히

    “돈을 사랑하지 말자.”

    라고 끝내면 조금 부족한 것 같습니다.

    더 깊은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돈을 믿고 있는가?

    내 능력을 믿고 있는가?

    내가 가진 자산을 믿고 있는가?

    미래의 경제 상황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돈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돈이 우리의 안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재산이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투자 수익이 우리의 미래를 완전히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돈보다 더 큰 것을 의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이 질문을 한번 자신에게 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돈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내 집값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일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노후를 두려워하는가?

    가진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그 두려움의 가장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쩌면 이런 마음이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이것은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을 하나님 앞에 가져갈 때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돈이 없을까 두려워합니다.”

    “제가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보다 돈을 먼저 바라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돈의 유혹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고 또 가장 나중까지 마주하는 현실적인 부분입니다.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열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3942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재산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벌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지혜롭게 관리하고,

    정직하게 일하고,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돈도,

    내가 가진 능력도,

    내가 가진 직업도,

    내가 가진 집도,

    내가 가진 투자자산도

    결국 내 인생을 완전히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돈이 나의 안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안전이 되기를

    돈의 유혹은 정말 무섭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돈이 없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강하게 우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을 무조건 탐욕스럽다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쩌면

    두려움과 불안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돈이 필요하고,

    안정되고 싶고,

    미래가 걱정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 다시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 제가 돈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되 돈을 의지하는 사람은 되지 않게 해주세요.”

    “미래를 준비하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돈이 줄어들어도 하나님을 잃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가진 것이 많아져도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나의 안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안전이라는 사실을 믿게 해주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오늘도 이 말씀을 마음에 품어봅니다.

    돈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올바른 자리에 내려놓는 것.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어쩌면 이것이 돈의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믿음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골리앗 앞에 선 다윗, 민사소송을 시작하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 민사소송을 시작하다

    골리앗과의 싸움! 민사소송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걱정한 사람들은 가족이었습니다.

    제가 소송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가족들이 가장 먼저 물었던 것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변호사 비용은 어떻게 하려고?”

    그 말을 듣고 보니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상대방은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증권사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것 같았고, 변호사를 선임하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이미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또다시 큰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의 걱정은 당연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정말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상대방이 얼마나 강하게 나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혼자 소송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겪은 일이 정말 잘못된 일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끝까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정말 사실인지, 내가 가진 증거가 법정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리고 이 사건을 법은 어떻게 판단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나 홀로 민사소송을 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앞에는 하나의 거대한 산이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골리앗과 다윗

    성경을 읽다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골리앗은 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습만 보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전쟁의 전문가도 아니었고, 거대한 무기를 가진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골리앗을 보면서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크기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민사소송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가족들은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걱정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피고인 증권사에서 준비서면을 보내왔고, 재판에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내세운 것은 대형 로펌이었습니다.

    변호인은 무려 네 명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혼자 소송하는데 상대방은 변호사가 네 명이나 된다고?”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대방은 거대한 증권사였고, 그 뒤에는 대형 로펌과 여러 명의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였습니다.

    객관적으로만 보면 너무나 불리해 보였습니다.

    마치 거대한 골리앗 앞에 작은 다윗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오히려 담담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86421

    상대가 커질수록 마음은 더 담담해졌다

    가족들은 상대방의 규모를 보면서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때부터 더 차분해졌습니다.

    왜였을까요?

    아마도 처음부터 제가 이 싸움을 사람과 사람의 힘겨루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일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증거를 하나씩 정리하고,
    상대방의 주장에 사실관계가 맞는지 살펴보고,
    법원에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성실하게 설명하는 것.

    그것이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상대방에게 변호사가 몇 명인지, 얼마나 큰 로펌인지, 얼마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사건을 하나씩 공부했습니다.

    문서를 다시 읽고, 날짜를 확인하고, 증거를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법률 용어 하나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하니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송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주장을 얼마나 사실과 증거로 설명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싸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법률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조심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찾아보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을 내려놓다

    상대방이 대형 로펌을 선임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에는 저도 잠시 생각했습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질문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은 포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제가 지금까지 이 소송을 끌고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정말 혼자였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법원에 제출할 서류를 준비할 때도, 상대방의 준비서면을 읽을 때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할 때도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알게 해 주세요.”

    “제가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않게 해 주세요.”

    “제가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결과가 어떠하든 이 과정을 통해 제가 하나님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해 주세요.”

    저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보다 더 큰 힘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에게도 골리앗보다 더 큰 무기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거대한 상대 앞에서 내가 배운 것

    돌이켜보면 상대방이 대형 로펌을 내세웠던 순간은 오히려 제게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상대방의 크기를 바라보기보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가 네 명이다.”

    “대형 로펌이다.”

    “상대방은 거대한 증권사다.”

    이런 사실들이 처음에는 크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실들이 제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얼마나 큰지는 제가 할 일을 대신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하나였습니다.

    끝까지 진실을 확인하고, 제가 가진 증거를 성실하게 제시하는 것.

    그리고 결과는 법원에 맡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시는 또 하나의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골리앗처럼 거대한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문제 앞에서 자신이 너무 작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크기가 우리의 믿음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대한 문제를 만났을 때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8월 18일, 법원에서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크기가 보였습니다.

    그다음에는 제 자신의 부족함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혼자 싸우는 것처럼 보였던 그 길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골리앗이 아무리 커 보여도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골리앗의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바라보고 있느냐였습니다.

    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대한 증권사와 대형 로펌, 네 명의 변호인단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정직하게 제 길을 걸어갈 수는 있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해야 할 몫은 끝까지 감당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제가 민사소송을 통해 배우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골리앗이 커질수록 다윗이 더 위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야말로,

    내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다시 확인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 내면의 치유 시리즈 ②

    내면의 치유 시리즈 ②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용서하지 못할까요?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모두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원망이 되고, 분노가 되고, 마음속에 단단한 벽을 만들기도 합니다.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나를 그렇게 대했을까?”
    “나는 아직도 그 일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이러한 기억은 우리의 마음을 계속 괴롭히고 무겁게 붙잡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용서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상처가 깊을수록, 배신이 클수록, 억울함이 클수록 우리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단순히 “용서하라”고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의 상처,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감정보다 먼저 믿음에서 시작되는 일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풀리면 하겠다.”

    하지만 성경은 조금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감정이 모두 해결된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은 아직 아플 수 있습니다.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한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아시며,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한 걸음 씩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도
    함께 치유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으로 순종이 어려워 힘들어 하는 자들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억압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 제작: (ChatGPT)AI 생성 지이미지

    하나님을 깊이 알수록 은혜는 커집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고, 넘어졌으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고, 갚을 수 없는 사랑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시선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나도 이렇게 복음에 빚진 자인데…’

    이 깨달음은 억지로 참는 마음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내 마음을 붙잡고 있던 미움과 원망을 하나님께 맡기는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의 임재 안에서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되면 부정적인 마음에 자신을 내 맡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상한 감정을 맡겼을 때 누리게 되는 참 평안을 알게 되면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더욱 알고 싶은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의와 심판을 맡기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영혼은 왜 중요할까요?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57717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결국 나 자신을
    더 아프게 합니다

    원망은 상대방보다 먼저 내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미움은 생각을 지배하고,

    분노는 평안을 빼앗으며,

    복수심은 우리의 영혼을 지치게 만듭니다.

    겉으로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속에서는 과거의 상처를 반복해서 떠올리며 스스로를 괴롭히게 됩니다.

    용서하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를 위한 일이기 전에 나 자신의 자유를 위한 일 입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회복시키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까지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 마음부터 변화 시켜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상처,

    오랫동안 품어 왔던 원망,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눈물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아픔을 내려놓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조금씩 부드럽게 하십니다..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순종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새롭게 변화 시켜 주십니다.


    용서는 치유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용서는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상처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치유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 뿐 아니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치유하시고 억압에서 자유 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솔직히 내어 드려 보십시오.

    “하나님, 제 안에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 주십시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자유하게 하시며,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함께 묵상해 보세요

    • 지금도 내 마음속에 놓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해 보세요!

    마무리하며

    용서는 인간의 의지 만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조금씩 배워 가는 삶의 과정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키시는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 하나님이-반복해서-말씀하시는-이유

    하나님이-반복해서-말씀하시는-이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없이 말씀하신 신실하신 분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민수기 23:19)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은 제 삶 가운데 오랜 시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결같이
    말씀하셨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출처 : 페이스북 저장 글



    2015년 겨울
    잊을 수 없는 한 꿈


    2015년 12월 19일

    며칠 전에 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땅 위에서 보니 맨홀 같은 웅덩이가 있어서 내려다 보니
    그 곳은 아주 커다랗고 넓고 깊은 구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마치 해발 고도가 832m에 이르고 총 고개의 연장 길이가 13km 이며
    99개의 고개의 굽이가 있는 대관령 고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봤을 때와 같은..

    그런 깊은 곳 아래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던 시간 때 부터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빠른 속도로 땅 위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꿈 속이었지만 너무 놀라서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깊은 아래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구렁이가 쉭쉭 소리를
    내며 올라오고 있었는데,
    두 바퀴 정도면 곧 땅 위로 올라올 기세였습니다.

    꿈속에서도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꿈 속이었지만 그 구렁이가 머지않아 땅 위까지 올라 오면
    모두가 죽는다 라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순간
    제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절박하게 주님을 찾아야 할 때다.”

    꿈의 내용보다
    제 마음에 남겨 주신 이 한 문장이
    더 강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출처 : 페이스북 저장 글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말씀하셨습니다.

    2016년에는 또 다른 꿈을 통해 여러 가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꿈 속에서는

    • 지휘권을 넘겨주지 말라는 의미
    •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라는 마음
    • 언제나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
    • 사람을 부풀려 말하지 말라는 교훈

    등이 제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을 미리 아시고
    제게 꿈으로 알려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의미를 모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말씀하신 내용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분별력이 있는 자들은 본질을 추구합니다 – 현상이 아닌 진실을 바라보는 성경적 분별력의 원리



    *왜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즉시 해결하지 않으실까? 기다림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


    출처 : 페이스북 저장 글




    그리고 2026년…

    올해 1월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께서 제 마음에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라!”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라!”

    다시 한번,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라!”

    그 순간 제 마음에는 한 가지 확신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주님께서 하실 일의 목적은
    어떤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시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35738

    하나님은 언제나 일관되게 말씀하십니다

    뒤돌아보면 단 한 번도 서로 다른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그림처럼 연결되었습니다.

    성경도 그렇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두 번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은 여러 번 들려오는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았습니다.

    선지자들도 같은 메시지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도하시며 때가 되면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건과 뉴스를 접합니다.

    사회도 흔들리고,
    정치도 흔들리며,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게 오랫동안 가르쳐 주신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꿈의 마지막에 남겨진 마음도,

    성령께서 주신 말씀도,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더욱 찾으라.”

    그리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라.”

    이것이 제게 계속해서 말씀하신 핵심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믿습니다.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십니다.

    그리고 뒤돌아보면,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말씀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맺음말

    저는 앞으로도 사람을 드러내기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을 바라보게 하지만,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라.”

    그 이름만이 소망이며,

    그 이름만이 영광을 받으실 이름입니다.

    신실하신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 함께 묵상할 말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영원하도다.”
    (시편 100:5)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그는 미쁘시니 그 약속하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0:23)

  • 고난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를 만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건강의 문제, 인간관계의 갈등, 예상하지 못한 실패와 상실….

    가능하다면 누구나 그런 문제 없이 평안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누구도 아침에 눈을 뜨며 “오늘은 어려운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다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질병,
    예상하지 못했던 경제적 위기,
    믿었던 사람에게 받은 상처,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가장 먼저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까?”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문제 없는 사람보다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기록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문제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가장 깊은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증상이 아니라 원인을 보라, 해결은 그곳에서 시작된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



    우리는 왜 문제를 싫어할까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안정과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삶에서는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형편이 넉넉하면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고,

    건강하면 자신의 힘을 믿게 되며,

    모든 일이 잘되면 자신의 계획이 옳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문제가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삶 속에 문제를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 돌리게 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위대한 믿음은 모두 문제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대부분 큰 문제를 통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 가운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했습니다.

    모세는 홍해 앞에서 더 이상 인간의 방법이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도망자의 삶을 살며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핍박과 환난을 통과하면서 복음의 능력을 더욱 선명하게 경험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문제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아는 믿음의 간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가 클수록 하나님의 일하심도 더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때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신뢰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방법이 없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기적을 보여 주시는 무대였습니다.

    오병이어 역시 사람들에게는 절망이었지만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시간이었습니다.

    문제가 커질수록 우리의 두려움도 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문제의 크기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제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배경이 됩니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56436

    하나님은 문제보다 우리를 먼저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는 문제의 해결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문제를 해결하시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먼저 변화시키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은 그대로인데 마음이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두려움이 평안으로,

    원망이 감사로,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시고 인격을 빚어 가십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는 해결보다 변화가 먼저 일어납니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은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출처 : AI 창작 이미지 | ChatGPT(DALL·E) 활용 제작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의 질문도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묻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질문을 조금 바꿉니다.

    “하나님, 이 일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시려 하십니까?”

    “이 문제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시려 합니까?”

    질문이 바뀌면 시선이 바뀌고,

    시선이 바뀌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집니다.

    그때 우리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이전과 다른 믿음을 갖게 되었고,

    사자굴에서 나온 다니엘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몸소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를 통과한 사람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단순히 문제를 없애시는 것보다 문제 가운데 함께하시며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실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끝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시작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실패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새로운 시작으로 사용하십니다.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문제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문제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눈물은 내일의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고난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문제는 훗날 돌아보았을 때 “그때 하나님을 가장 선명하게 만났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기대하는 참된 평안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