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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계실까?

    지금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계실까?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정치도 보이고,
    경제도 보이고,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들도 보입니다.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고,
    점점 더 악해져 가는 세상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거짓과 탐욕,
    분열과 혼란이 점점 커져 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만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에도,
    타락이 극심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자신의 백성들을 찾으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세상을 향한 경고를 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백성들이 깨어 있기를 원하셨고,
    그들의 믿음이 바로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이야기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
    누가 문제이고 누구를 비판해야 하는지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질문하실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어쩌면 다른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해졌는가?”

    보다

    “너는 지금 깨어 있는가?”

    를 물으시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의 백성들을 찾고 계십니다.

    세상이 얼마나 어두운가를 바라보기보다,
    내가 얼마나 빛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더욱 정결하게 하시고,
    더 깊은 믿음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어떤 시대가 오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이나 이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깨어 있는 백성들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 “의미 없는 분주함을 넘어”

    “의미 없는 분주함을 넘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두 종류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는 일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오늘 있었던 일, 관심사, 취미와 같은 가벼운 대화들입니다.

    또 하나는 그 일들 속에 담긴 의미와 목적, 그리고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일상적인 대화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대화보다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을 나누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대화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넓게 관계를 맺기보다, 몇 사람과라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계실까?


    또한 서로를 이기기 위해 설전을 벌이는 대화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세워 주는 대화를 원합니다.

    어쩌면 제가 SNS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말들 속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 삶에 실제적인 의미를 더해 주는 일에 마음을 쏟고 싶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주님, 제가 시간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더 가치 있고 건설적인 길을 보여 주세요.”

    바쁘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도
    의미 없는 분주함에 휩쓸리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향을 따라 걸어가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도 그 답을 주님께 묻고 싶어집니다.

  • “너의 꿈은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

    “너의 꿈은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

    어릴 적 제 꿈 중 하나는 어려운 이웃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속에 그 꿈을 다시 떠오르게 하셨고,
    요양보호사 공부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배움이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현실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강사님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르신들과 친해지려면 배설물도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습 경험을 들을 때마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이 결코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약함과 불편함까지 품고 섬기는 사랑은
    사람의 결심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너의 꿈은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

    주님은 제가 꿈을 이루는 방법보다 먼저
    주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은 멀리서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사람만 품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섬김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흘러넘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부족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주님께서 주신 꿈은
    주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하고 하는 신앙생활은 종교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수록 주님을 묵상하지 않고는,
    그분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삶으로 나타내며 살아간다는 것이
    제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람의 열심과 의지로는 잠시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없다면 결국 사랑도, 순종도, 섬김도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양보하고,
    더 많이 이해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의지로 시작한 사랑은
    내 마음이 지치면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하고,
    내가 베푼 만큼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지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불평이 올라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안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지금 주님 때문에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이 되기를 바라면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제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먼저, 내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단순히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한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은 제 마음의 방향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는 시간이었습니다.

    내 생각이 앞서 있을 때 말씀 앞에 서고,
    내 감정이 앞서 있을 때 기도로 내려놓고,
    내 뜻을 주장하고 싶을 때 주님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다 보면
    조금씩 제 안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내가 손해 보는 것을 먼저 생각했다면
    어느 순간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고,

    예전에는 ‘왜 저 사람은 저럴까?’라고 생각했다면
    조금씩 ‘저 사람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한순간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 앞에서 속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마음을 그대로 붙들고 있기보다
    주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연약함 속에서도 일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제가 연약하고 부족했던 시간에도
    한 걸음씩 인도해 주셨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는 필요한 일터를 허락하셨고,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보내셔서
    새로운 경험과 배움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당장 필요한 일을 해야 했고,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경험했던 일들이
    그냥 지나간 시간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일은 제게 인내를 가르쳐 주었고,
    어떤 일은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어떤 일은
    제가 얼마나 쉽게 판단하고,
    얼마나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때는 힘들다고만 생각했던 시간이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저를 빚어 가시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만
    우리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배우게 하시는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 같습니다.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9137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과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고 싶어 하시는 곳이 다르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아마 신앙의 길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

    내가 편한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음을 두고 계신 곳을 바라보는 것.

    그런데 주님을 묵상하다 보면
    조금씩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의 편안함만을 위해 사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면받는 사람에게 다가가셨고,
    아픈 사람을 돌아보셨으며,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마음을 기울이셨습니다.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이라면 이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주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

    ‘내가 지금 해야 할 순종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방향과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다를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필요한 것이
    내 뜻을 관철하는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순종이라는 것도 배워 갑니다.


    섬김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을 하고 있어도
    그 마음의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칭찬받기 위해 섬길 수도 있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섬길 수도 있습니다.

    또 내가 섬겼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몰라줄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섬김은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보다
    누구의 마음으로 그 일을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
    을 배워 갑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섬김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하는 것.

    내가 알아주기를 바라기보다
    주님께서 아신다는 사실로 만족하는 것.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섬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간다는 것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을 많이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에게 한마디 더 참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과 상황 속에서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는 것.

    그렇게 한 번 더 주님을 바라보고
    한 번 더 내 마음을 내려놓는 것.

    어쩌면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가는 과정은
    그렇게 아주 작은 순종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해야 할 때 마음에 붙들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생각과 감정 때문에 머뭇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저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 주시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말씀을 통해 돌이키게 하시며,
    제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시간을 통해 하나씩 보여 주십니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하나님의 손길

    돌이켜보면 제 삶에는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때는 답을 알 수 없었습니다.

    왜 이곳으로 보내셨는지,
    왜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하셨는지,
    왜 내가 원하지 않았던 일을 경험하게 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조금씩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이해하게 만들고,
    그때 배운 것이 지금의 누군가를 섬기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당장 이해되지 않는 일 앞에서도
    조금은 다르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고 묻기보다

    ‘주님, 이 일을 통해 제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라고 묻게 됩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상황을 바라보는 제 시선이
    조금씩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역시
    주님께서 제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제는
    내가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 마음에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곳에서
    나도 함께 마음 아파하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나도 조금 더 사랑하고,

    주님께서 돌아보시는 사람을
    나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제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묵상하고,
    말씀 앞에 서고,
    기도하며,
    내 마음을 주님께 내어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해 주세요.
    제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을 바라보게 해 주세요.
    사람의 열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사랑하게 해 주세요.
    제 힘으로 순종하려 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함으로 순종하게 해 주세요.’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제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를 인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했지만
    그 자리에서부터 한 걸음씩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걸어가고 싶습니다.

    오늘 제가 서 있는 그곳이
    제가 원해서 온 자리인지,
    예상하지 못했던 자리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곳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마음을 두신 곳에
    저의 마음도 머물게 하시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저도 사랑하게 하시며,

    주님께서 맡겨 주신 작은 자리에서
    묵묵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훗날 다시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을 때
    ‘그때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셨구나.’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을 바라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저의 마음도 있게 하소서.

    아멘.

  •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이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이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이름 ‘예영’

    얼마 전 오래된 기록들을 정리하다가 참 귀한 메모 한 장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태어날 아기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품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큰아이가 방언으로 기도했고, 가족들은 그 기도의 내용을 통변하여 기록해 두었습니다.

    오래된 노트에 적혀 있던 그 내용을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다시 읽어 보니 마음이 참 묘했습니다.

    당시에는 그 말씀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태어날 아이를 위해 기도하던 중 받은 말씀이라고 생각했고, 혹시 잊어버릴까 기록해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읽어 보니 그 내용이 너무나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가장 귀하게 쓸 것이며…”

    “내가 특별히 그 아이의 이름을 지을 것이며…”

    “너의 영향력 안에 살 아이가 아니라 내 백성 안에 있다…”

    “그 아이가 네 안에 있을 때에도 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이고…”

    “세상에 나갈 때까지 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이 말씀이 앞으로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기록해 두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다시 읽으면서 오래전 한 장면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바로 예영이를 낳기 하루 전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신 이름

    예영이를 낳기 하루 전, 가족들이 함께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딸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정말 딸이 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 제 마음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네가 딸을 원하지 않았느냐?”

    그 순간 제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고백이 흘러나왔습니다.

    “주님, 이 아이가 정말 딸이라면 이 아이는 예수님께 영광입니다.”

    그 고백을 하는 순간 제 마음에 한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예영’

    그 이름이 어디에서부터 떠올랐는지 설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제 마음에는 분명하게 그 이름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이는 딸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아이의 이름을 예영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감사했습니다.

    기도 가운데 딸을 주신 것도 감사했고, 마음에 떠오른 이름을 아이에게 붙일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몰랐습니다.

    그 이름을 생각하게 된 일이 몇 달 전 기록해 놓았던 통변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특별히 그 아이의 이름을 지을 것이며…”

    세월이 흘러 오래된 기록을 다시 발견했을 때 가장 마음에 깊이 들어온 문장이 있었습니다.

    “내가 특별히 그 아이의 이름을 지을 것이며…”

    저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짓기 전부터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이 기록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모두 해석하거나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삶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돌아보면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의 성별조차 알지 못하던 때에 아이를 위해 기도했고, 그 기도 가운데 이름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산 하루 전, 기도하는 가운데 제 마음에 한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그 후 실제로 딸이 태어났고 그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 오래된 기록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제게는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6190

    그때는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이 일을 통해 제가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삶을 살아갈지,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예영이를 임신했을 당시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이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제가 알지 못했던 시간에도 그 아이의 삶을 알고 계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늘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내일을 보십니다.

    저는 한 장면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장면 앞뒤에 있는 모든 시간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한순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일은 어느 한 날에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2003년에는 가족들이 함께 아이를 위해 기도했고, 방언 통변을 통해 아이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출산 직전에는 기도하는 가운데 아이의 이름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2016년에는 그 일을 다시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오래된 노트를 정리하다가 그 기록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당시에는 각각의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2003년에는 2003년의 시간을 살았고, 출산할 때는 출산의 순간을 살았으며, 2016년에는 그때의 기억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돌아보니 조금씩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시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한 걸음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한 걸음을 믿음으로 걸어가면 또 다른 한 걸음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도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내 기도를 들으시는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것이 나를 다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간 것 같았던 작은 사건이 훗날 아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이번에 발견한 오래된 메모가 그랬습니다.

    2003년의 한 장의 기록이 2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다시 제 앞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기록을 통해 지나온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도 일하고 계셨구나.”

    이 생각이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만 보고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작도 아시고 끝도 아십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아셨고,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도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기도했지만 아직 응답되지 않은 일도 있고, 왜 그런 과정을 지나야 했는지 알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영이의 이름을 통해 지나온 시간을 다시 돌아보면서 한 가지를 배웁니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방법으로 일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20년이 지나 다시 발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2003년에 기록했던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저는 과거의 한 사건만 떠올린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을 지나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에는 방언 통변을 통해 말씀하셨고,

    출산 직전에는 이름을 생각나게 하셨으며,

    2016년에는 그 일을 다시 기록하게 하셨고,

    지금은 오래된 기록을 다시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각각의 순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닫기 전부터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때에도 알고 계셨고,

    우리가 보지 못할 때에도 보고 계셨으며,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주 오래된 기록 한 장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합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으신가요?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 있으신가요?

    자녀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마음이 답답하신가요?

    그렇다면 오늘의 상황만 바라보며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 장면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뒤돌아보면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준비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예영이의 이름을 통해 그것을 다시 배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기 전부터 알고 계셨고, 우리가 보기 전부터 준비하고 계셨으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삶 가운데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다시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내가 아직 보지 못하는 길도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시고,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며,

    내가 아직 답을 얻지 못한 기도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저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그때도 주님이셨고 지금도 주님이십니다.
    제가 알지 못했던 순간에도 주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예영이의 이름을 통해 제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앞으로의 삶 가운데서도 계속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향해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하고 계신 것이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은 보이지 않아도,

    아직 이해되지 않아도,

    아직 응답이 오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주님은 인격이십니다

    주님은 인격이십니다

    주님은 인격이십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이 일을 2016년 12월 31일 페이스북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찬호는 제 옆에서 통변하며 기도 내용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때는 그저 기도 가운데 주어진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 기록을 읽어 보니,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새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그 기도문 속에 담겨 있던 주님의 마음을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마치 주님께서 찬호에게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니?”

    “나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고 있니?”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너를 사랑한단다.”

    오래전의 짧은 기도 기록이었지만, 지금 다시 읽어 보니 그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중요한 질문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거룩하시며,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과 인물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을 오래 읽었고, 교회를 오래 다녔으며, 설교를 많이 들었고, 여러 사역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득 이런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을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일까?”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과 나이, 직업, 가족관계, 좋아하는 음식까지 알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그 사람과 대화하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바르게 아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혼잣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도 단순히 오래된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의 뜻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니?”

    오래전 찬호의 기도문을 다시 읽으면서 이 질문이 제 마음에도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니?”

    이 질문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너는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 정말 알고 있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니?”

    “내가 네 삶 가운데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니?”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를 신뢰할 수 있니?”

    “네가 원하는 응답을 받지 못할 때에도 나를 사랑할 수 있니?”

    이 질문 앞에 서면 저 자신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 알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인가?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 삶을 잘되게 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이름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53610

    우리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을까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사역을 감당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역이 많아지고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일이 잘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신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의 상황이나 성과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역이 성공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결국 신앙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고 싶은 것입니다.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사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특별한 경험을 하기도 하고, 말씀을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섬김의 은사를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를 가지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돕는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은사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특별한 경험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앞설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보다 하나님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는 믿음이 아닐까요?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인격적인 관계에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했던 마음도 아십니다.

    내가 감추고 싶은 생각도 아십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도 아십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지도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모습만 보고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도 아시고,

    실수할 때도 아시고,

    믿음이 흔들릴 때도 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두려움으로만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어떻게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작은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함께해 주세요.”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혼자 판단하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 생각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고 싶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저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깨닫게 해주세요.”

    이렇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이 쌓여 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조금씩 깊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요구사항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나는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요즘 저는 제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해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너무나 큽니다.

    사람들의 평가도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무엇이 성공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가져야 행복한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목소리가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때로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 생각이 너무 앞서갈 때도 있습니다.

    내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크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커도 말씀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람의 평가가 아무리 중요하게 느껴져도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진정한 승리는 주님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흔히 승리를 환경이 좋아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계획했던 일이 성공하면 승리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순간도 감사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의 승리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상황이 여전히 힘들어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승리입니다.

    답을 아직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승리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이 승리입니다.

    내가 원하는 길이 열리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이 믿음의 승리입니다.

    결국 진정한 승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잃지 않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전 찬호의 기도문이 오늘의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옵니다

    2016년 12월 31일에 기록했던 글을 다시 읽으며 저는 시간을 넘어 다시 질문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찬호를 향해 주님께서 주셨던 것처럼 느껴졌던 말씀,

    “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니?”

    그리고

    “나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고 있니?”

    라는 질문이 이제는 제 마음을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의 신앙도 익숙해집니다.

    기도도 익숙해지고,

    예배도 익숙해지고,

    성경을 읽는 것도 익숙해집니다.

    교회 생활도 익숙해집니다.

    그런데 익숙함이 반드시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대하는 마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님, 제가 주님을 알고 있습니까?”

    “주님, 제가 주님보다 다른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주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분이 아닙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만 기도하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함께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기쁜 날에도 함께하시고,

    눈물 나는 날에도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확신에 차 있을 때도 함께하시고,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주저앉고 싶은 순간에도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특별한 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가족과 이야기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 지금도 함께 계시지요?”

    이렇게 마음으로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있다면 그 말씀을 따라 살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흘려보내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나 역시 은혜를 베풀고 싶어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혼자 결정하기보다 하나님께 묻는 습관이 생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의 열매가 아닐까요?


    오늘 다시 주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오래전 찬호의 기도문을 다시 읽으며 이제는 제가 주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더 알아가게 해주세요.”

    “제가 주님에 관한 지식만 쌓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주님과 실제로 교제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저도 기뻐하게 해주세요.”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저도 멀리하게 해주세요.”

    “세상의 수많은 음성보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해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을 주님으로 사랑하게 해주세요.

    주님께서 무엇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하게 해주세요.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지만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것 같은 친밀함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가 보십시오.

    “주님, 제가 주님을 알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과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래전 찬호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나는 누구보다 너를 사랑한단다.”

    이 말씀은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2016년 12월 31일에 기록해 두었던 짧은 기도문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읽으면서 저는 한 가지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고 사랑하고 교제해야 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도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은사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니?”

    “나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고 있니?”

    이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걷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나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의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걷기를 원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세상의 소리보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며,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 쌓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오래전 찬호의 기도문을 통해 다시 들려오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나는 누구보다 너를 사랑한단다.”

    이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과 함께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래전의 한 기도문을 다시 돌아보며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주님,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자신과 가까이 교제하지 못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성경의 지식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사역보다 하나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며,
    은사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귀하게 여기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수많은 소리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자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자

    우리는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또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가족일수록 상처를 주기 쉽고, 오래된 친구일수록 서운함이 쌓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는 이해관계가 앞설 때가 많고, 교회 안에서도 기대와 실망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우리은 죄로 인해 쉽게 자기중심적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보다, 나에게 잘해 줄 때 사랑하고 기대를 충족시켜 줄 때만 사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우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사랑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희생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유익만 구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보다 선택입니다

    많은 사람은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합니다. 감정이 좋으면 사랑하고, 감정이 식으면 사랑도 끝났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의지이며 선택입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화가 나는 순간에도 부드러운 말을 선택하는 것, 상대를 이해하려고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감정만으로는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조금씩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먼저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먼저 말하고, 자신의 입장을 먼저 이해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경청에서 시작됩니다.

    상대의 아픔을 들어 주고, 말하지 못한 마음을 헤아려 주며, 판단보다 공감을 먼저 선택하는 태도는 사랑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실 때마다 그들의 말을 들으셨고,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사람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사랑이었습니다.

    *용서-죽음을 앞두고 가장 어려운 일은 왜 일까?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10130

    사랑은 용서를 통해 자랍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람입니다. 실수하고, 상처를 주고, 기대를 저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사랑을 지키는 힘은 완벽함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용서는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붙들고 살아가지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조금씩 용서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사랑은 작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사랑은 거창한 말보다 작은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따뜻한 인사 한마디, 힘든 사람을 위한 기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일, 가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일은 모두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특별한 날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작은 선택입니다.

    하나님께 배우는 사랑

    우리는 스스로 완전한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기도를 통해 자신의 이기심을 내려놓으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우리의 사랑은 조금씩 성숙해집니다.

    사랑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배우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성품을 예수님을 닮아 가도록 빚어 가십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오늘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요?

    멀리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 함께 일하는 동료, 교회 공동체,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큰 일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오늘 한 사람을 이해해 주는 것,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작은 사랑이 쌓일 때 우리의 가정이 변화되고, 공동체가 회복되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씩 보게 될 것입니다.

    에필로그

    진정한 사랑은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배우며 평생 자라 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때 우리는 사람을 바꾸려 하기보다 먼저 자신이 변화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제 감정보다 주님의 사랑을 따라 살게 하시고, 작은 일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 기도는 우리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할 것입니다.




  • 아버지가 생각나는 날

    아버지가 생각나는 날

    17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문득 생각납니다.

    특별히 아버지를 떠올릴 만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래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17년이 되었습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그때는 앞으로도 아버지와 함께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아버지는 제 곁을 떠나셨고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딸만 넷이었던 우리 집

    우리 집은 딸만 넷이었습니다.

    아들이 한 명도 없었던 집에서 아버지는 장녀였던 저에게 유난히 마음속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버지가 말씀하시니 듣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들이 하나씩 다시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시대에는 여자도 장관이 되고 대통령도 된다.”

    어린 저에게는 참 먼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여성이 국가의 중요한 자리에 오르는 일이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말 그럴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마거릿 대처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당시 어린 제게 마거릿 대처라는 이름은 그저 외국의 유명한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 정도로만 들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통해 단순히 한 여성 정치인을 소개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앞으로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얻고,

    여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하는 세상이 점점 변해갈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딸들에게도 남자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어린 딸에게 미래를 이야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여자니까 여기까지만 할 수 있다.”

    그렇게 한계를 정해 주신 것이 아니라,

    “너희 시대에는 여자도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 속에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와 믿음이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의 말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실제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가 그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이 정말 현실이 되었구나.’

    세상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여성의 사회 진출도 크게 확대되었고,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자리에도 여성들이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일이 실제 현실이 된 것을 보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지켜보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첫 여성 대통령의 등장은 분명 우리 사회에서 의미 있는 변화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희망을 품었습니다.

    저 역시 우리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여러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기대했던 모습도 있었고,

    실망스러운 모습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면서 생각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성별이나 직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보다 그 자리를 어떻게 감당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높은 위치에 올라갔느냐보다,

    그 위치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정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이 원리는 정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도 그렇습니다.

    부모라는 직책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배우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도 중요하지만, 부모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자녀들은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말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보다 실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보다 부모가 먼저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큰 가르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자의 직분과 역할은 분명 소중합니다.

    그러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그 사람을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남겨준 것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제게 남겨주신 것은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미래를 바라보는 눈을 조금씩 심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너희 시대에는 여자도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된다.”

    그 말씀을 들을 당시에는 그저 아버지의 생각이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말씀은 제게

    “너도 할 수 있다.”

    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세상이 정해 놓은 한계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라는 뜻처럼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능성을 바라보라는 의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어쩌면 딸들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제가 아버지의 나이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그저 부모님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고 부모님이 살아가셨던 시간을 돌아보게 되면 조금씩 다르게 보입니다.

    아버지도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기쁜 날도 있었을 것이고,

    힘든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말하지 못한 고민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미래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주고 싶었던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는 더 넓은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00942


    17년이 지나도 기억나는 말

    사람은 떠나도 말은 남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17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어린 시절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직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어떤 순간에는 아주 오래전의 말 한마디가 다시 떠오릅니다.

    그때는 아무 의미 없이 들었던 말이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안에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그때 조금 더 물어볼 걸.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오셨는지 조금 더 물어볼 걸.

    아버지가 살아오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물어볼 걸.

    이제는 물어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통해 아버지를 다시 만납니다.


    사람의 자리는 결국 그 사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제게 들려주셨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오늘 다시 생각합니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직책과 명예는 언젠가 내려놓아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모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보다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길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약한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생각나는 오늘

    오늘 문득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말씀하시던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여성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있고,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직책이나 성별이나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자리에 있든 그 자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아버지도 그것을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딸들이 단순히 성공하기를 바라셨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17년이 지난 오늘,

    문득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린 딸에게 미래를 이야기해 주셨던 것,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셨던 것,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알려주셨던 것.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 말들이 제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아버지가 남겨주신 말은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통해 저는 지금도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버지가 생각나는 날입니다.

    오늘은 오래전 아버지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씀드립니다.

    “아버지, 그때 하셨던 말씀처럼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어요.”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아버지가 제게 말씀하셨던 것은 단순히 여성이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미래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너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지 말아라.”

    “세상이 정해 놓은 한계보다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아라.”

    라고 말씀하고 계셨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아버지가 제게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많이 생각납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삶으로 배웁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한 가지 착각 속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노력은 중요합니다.

    기도도 중요하고 말씀을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시간을 조금씩 지나오면서 한 가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열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내가 억지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할 때보다, 내 힘을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더 놀랍게 일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과 의지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이 둘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문제가 생기면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방법을 찾고,

    사람을 찾고,

    계획을 세우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먼저 계획을 세워 놓고 하나님께 따라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묻고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첫 번째 과정은 어쩌면 내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직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 고백이 처음에는 실패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믿음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열심히 일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배우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다만 그 결과를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

    물을 주는 것도 내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가 자라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순종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걸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실제적인 변화와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억지로 만들어 내는 열매

    돌이켜 보면 저 역시 많은 것을 억지로 이루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기도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더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애를 쓸수록 마음은 지치고 열매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쩌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내가 대신하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을 내가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통제하려 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먼저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는 조급함이 생겼습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실망했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었으며,

    내가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쩌면 다른 것을 가르쳐 주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려고 하기보다 먼저 나를 의지하라.”


    *순종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5468


    가장 좋은 열매는 하나님께서 맺게 하십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장 애써서 만들어 낸 결과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맡겨 드렸던 일에서 더 좋은 열매가 맺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애썼을 때보다 기도하며 기다렸을 때 관계가 회복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을 때보다 하나님께 맡겼을 때 길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애써 만든 열매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친히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결과를 만드는 것보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안에 거하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있으면서 스스로 열매를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가지가 해야 할 일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나무에서 공급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가지를 통해 열매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스스로 거룩한 열매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것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고,

    기도가 살아나며,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그 결과 우리의 삶 가운데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께 붙어 있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아는 법도 배웁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면서 또 하나 배우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원하면 빨리 결과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했으면 바로 응답되기를 원하고,

    노력했으면 바로 열매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기다리는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그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시간일 수 있고,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시간일 수 있으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시간에도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응답이 없을 때도 주님을 신뢰하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주님을 바라보고,

    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때도 주님을 붙드는 것.

    그것이 믿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면 마음의 중심이 달라집니다

    주님을 의지한다고 해서 삶의 문제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대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면,

    이제는 “주님, 이 상황에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묻게 됩니다.

    예전에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해야 할 순종을 찾게 됩니다.

    예전에는 결과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이제는 결과보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면서 나타나는 변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령을 의지하는 삶

    얼마 전 오래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2000년 5월에 기록했던 글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그때 성령의 감동을 따라 약 10일 동안 A4 용지 40장 분량의 글을 기록했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 그 글을 다시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그때 기록했던 내용 가운데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라.”

    그리고 또 하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가정을 회복하라.”

    그때는 그 말씀의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지나온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결국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생각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먼저 구하고,

    내 감정보다 말씀을 붙들며,

    내가 원하는 결과보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필요한 열매를 맺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했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했고,

    내가 계획한 일이 잘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보다 먼저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해 주세요.”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만 찾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해 주세요.

    길이 보이지 않아도 주님을 따라가게 해 주세요.

    기다림이 길어져도 포기하지 않게 해 주세요.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려 하기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맺으려고 애쓰는 열매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 삶을 통해 맺게 하시는 열매를 기다리게 해 주세요.

    오늘도 주님을 의지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모두 배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배워야 할 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고,

    내가 해야 할 순종은 충실하게 감당하되,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믿음의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저는 제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기보다 주님께 붙어 있기를 원합니다.

    더 많이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더 깊이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 삶을 통해 어떤 열매가 맺히든 그것을 내 자랑으로 여기기보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26년 전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다시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게 하소서.”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시고,

    내 지혜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구하게 하시며,

    내 계획보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게 하소서.

    그리고 오늘도 주님 안에 거하게 하소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오늘도 한 걸음씩 주님과 함께 걷겠습니다.

    아멘. 🙏

  • 26년 전 주님이 주셨던 말씀을 26년 후 다시 읽다

    26년 전 주님이 주셨던 말씀을 26년 후 다시 읽다

    최근 오래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록 하나를 다시 발견했습니다.

    2000년 5월에 기록했던 글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따라 약 10일 동안 글을 기록했습니다. A4 용지로 무려 40장에 이르는 분량이었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 그 기록을 다시 펼쳐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기록했던 것일까?’

    그리고 한 장 한 장 다시 읽어 내려가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많은 내용 속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성령을 의지하라.”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가정을 회복하라.”

    26년 전, 주님께서 주셨던 말씀

    당시의 글을 다시 읽어 보니 지금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글에는 사탄이 가장 먼저 무너뜨리려고 하는 곳이 가정이며, 성도들이 하나 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갈등과 분열을 일으킨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말씀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6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온 지금 다시 읽어 보니 그 말씀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다가옵니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 방식도 달라졌고, 소통하는 방법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가정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가정이 깨어지고 관계가 무너지는 아픔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여전히 배우고 있습니다.

    26년 전의 기록을 읽으면서 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라”

    그때 기록했던 글에는 성령 충만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제 마음에 다시 들어온 말씀이 있습니다.

    “너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26년 전에도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하나님보다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예전에 받았던 은혜를 붙잡습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떠올립니다.

    물론 그것은 귀한 간증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셨다고 해서 오늘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다고 해서 오늘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40장의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

    26년 전 제가 기록했던 40장의 글은 분명 소중한 자료입니다.

    그 글을 다시 발견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40장의 기록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글을 기록하게 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그때 저를 붙드셨던 주님께서 지금도 붙들고 계십니다.

    그때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동일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제 삶에도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쁨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기대했던 일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 다시 26년 전의 기록을 읽어 보니 오히려 한 가지가 선명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도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하나님이십니다.

    상황은 변했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고, 내가 보지 못했던 곳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주님께서 왜 그렇게 반복해서 성령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셨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6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환경도 변합니다.

    계획도 변합니다.

    내가 세웠던 생각과 목표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다릅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지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그 길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먼저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를 묻고 싶습니다.

    내가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앞서가시도록 기다리고 싶습니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기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분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상대방이 아닌 나를 가르치셨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8503


    “가정을 회복하라”는 말씀도 다시 생각합니다

    26년 전 주님께서 주셨던 말씀 가운데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가정을 회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말씀이 앞으로의 삶에서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마음에 남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은 단순히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게 됩니다.

    가정은 사랑을 배우는 곳이고,

    용서를 배우는 곳이며,

    기다림을 배우는 곳입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가장 큰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깊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정의 회복은 단순히 관계를 좋게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 가시는 회복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6년 전의 기록을 다시 읽으면서 저는 그때 주님께서 왜 ‘성령을 의지하라’는 말씀과 ‘가정을 회복하라’는 말씀을 함께 주셨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가정을 회복하려 하면 결국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면 달라집니다.

    내가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먼저 내 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회복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26년 전의 기록을 다시 읽으면서 또 하나 마음에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2013년에 제가 적어 놓았던 고백입니다.

    “더 은밀하고, 더 고요하며, 더 조용하고, 더 한적한 시간.”

    어쩌면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주님 앞에 머무는 시간.

    그곳에서 다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묻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획하기 전에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회보다 중요한 것

    최근 들어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하나씩 열리고 있습니다.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고, 새로운 일도 경험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만남과 기회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바라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회가 열린다고 해서 반드시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원하는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내가 가야 하는 길도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회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주신 분이 누구인지 분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주님보다 앞서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의미 있는 사역이라도 주님과의 교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해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놓친다면 결국 내 힘으로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일을 잘하는 방법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법인 것 같습니다.


    26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말씀

    2000년 5월.

    그때 저는 40장의 글을 기록하면서 그것이 26년 후의 제게 다시 읽히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지금의 저를 알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시간을 지나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어떤 일들을 경험하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26년 전의 기록을 다시 읽으면서 저는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시간이 지난다고 낡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말씀은 때로 오랜 시간 동안 내 마음 깊은 곳에 머물러 있다가 하나님의 때에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는 것을.

    26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이,

    26년의 시간을 지나온 지금에는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다시 그 말씀 앞에 서고 싶습니다.

    성령을 의지하라.

    가정을 회복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안에 거하라.


    오늘 다시 드리는 고백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어떤 문이 열릴지도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싶습니다.

    내가 가는 길에 주님이 함께하시는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 생각과 경험과 능력을 앞세우기보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걸어가고 있는가.

    26년 전 주님께서 주셨던 말씀을 다시 읽은 오늘,

    저는 그 말씀을 과거의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의 고백으로 다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게 하소서.”

    내 힘으로 살아가지 않게 하시고,

    내 생각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게 하시고,

    내가 앞서가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게 하소서.

    그리고 26년 전 제게 말씀하셨던 그 주님께서

    앞으로의 남은 삶에서도 변함없이 저를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6년 전에도 주님이셨고,

    오늘도 주님이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주님이실 것입니다.

    아멘. 🙏